무더운 한여름이다. 지난겨울, 계엄과 탄핵이라는 살을 에어간 날카로운 바람 뒤에 남겨진 이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모두 새로운 선택이라는 훈풍에 얼어 터진 동상이 치유되고, 싱그러운 여름날 새살이 돋아나는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다. 이러한 희망과 기대가 실현되길 간절히 소망하면서 무덥고 숨 막히는 열대야를 견디고 있다.
선출된 권력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미션을 받고 탄생했다. 한국 사회의 분열, 나날이 위태로워지는 안보 통상환경, 저성장의 늪 그 외에서 수많은 대내외적 도전을 받고 있지만, 그러한 도전을 이겨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나라의 정체성과 비전에 대한 국론 통합임은 분명하다.
국론 통합의 필요성을 더욱 긴요하게 만드는 것은 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 모호성(VUCA:volaility, uncertainty, complexity, ambiguity)으로 정의되는 시대적 상황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우리의 도전을 더욱 난제로 만들고 있고,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특정 개인이나 무리를 넘어서는 집단의 역량이 필요하다. '나 혼자 또는 우리끼리'라는 망상적 리더십은 이미 탄핵과 대선에서 국민이 심판하고 폐기되었다. 이제는 '자기 성찰과 겸손의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
어떤 정치인은 매일 거울을 본다. 자신의 얼굴에 묻은 흠을 닦아내고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또 다른 정치인은 창문을 보면서 항상 바깥만을 탓한다. 자신의 책임은 없고, 문제는 언제나 '다른 편'이다. 이 차이가 바로, 겸손한 리더십과 내로남불 리더십을 가르는 결정적인 갈림길이다. 내로남불의 정치는 진영대립과 국론분열의 악순환을 가져온다.
겸손은 약함이 아니라, 리더십의 품격이자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집단지성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겸손한 리더란 개인의 특성이 겸손하다는 뜻이 아니라, 집단이 개개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음을 배우는 사람이다. 겸손의 리더는 자신이 완전하지 않음을 안다. 그렇기에 경청하고, 타협하며, 조정한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그 용기야말로 가장 강한 리더의 증표다.
역사는 이런 리더를 기억한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을 탄압했던 김종필과 손을 잡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열린 자세로 반대 진영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들은 권력의 확장을 원하기보다 공존의 틀을 고민한 사람들이었다. 그 겸손이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반면에 내로남불의 정치인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의의 탈을 쓰고, 사적 이익을 챙긴다. 법과 원칙을 말하면서도, 그 잣대는 남에게만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정치 보복", "정당한 해명"이란 말로 방패를 들이댄다. 내로남불 정치인은 자기 성찰이 없기 때문에 모든 논란은 언론의 탓, 비난은 상대 진영의 탓이다. 이들은 책임지지 않는 리더십으로 정치를 '내 편만의 도덕'으로 왜곡시킨다.
국민은 지난 수년간 내로남불의 정치에 신물이 나 있다. 새 정부, 정당, 언론에 시스템을 바꾸고 공동체를 살리는 겸손의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다. 여당뿐 아니라 겸손한 리더십으로 새로이 무장한 새로운 보수진영의 탄생도 있어야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이 작동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분열과 불신, 피로감에 지쳐 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리더는 더 똑똑한 사람도, 더 강한 사람도 아니다. 더 겸손한 사람, 자신을 낮추어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 실용적이고 유연한 사람이다. 그 겸손함이 공동체의 미래를 만든다.
묻는다. 정치인들에게. 거울을 보는 리더가 될 것인가, 창문을 향해 손가락질만 하는 리더가 될 것인가를. 겸손한 리더십은 공감할 줄 아는 용기, 내려놓을 줄 아는 지혜, 그리고 모두를 위한 정치를 향한 첫걸음이다.
박은하 전 주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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