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때문에 직업을 잃을 위기에 놓인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대부분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어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가격 협상, 저작권 보호 등에서 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AI가 클릭 한 번으로 순식간에 그림을 만들고, 화풍을 복제해 생계를 위협해도 구제받을 수 있는 보호단체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이 AI의 등장으로 어려워진 시장에서 활로를 찾으려면 이권을 대변해서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2023년부터 일러스트 산업 동향을 살펴 온 김승훈 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공제회) 부국장은 19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년간 업계가 챗GPT, 구글 제미나이 등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과거엔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그림을 주문하면 단가가 100~200만원 사이에 책정됐지만 AI 등장으로 단가 후려치기가 시작돼 10만원 미만의 작업물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고 전했다.
김 부국장은 2022년 이전만 해도 AI의 그림은 엉성하고 서툴러 일러스트 업계를 위협하지 못했지만 올해 초 한국을 강타한 챗GPT '지브리풍 그림' 열풍이 순식간에 상황을 뒤집었다고도 설명했다. 그는 "단 몇 년 만에 우수한 AI가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이 더 이상 AI 그림에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됐다"며 "AI 등장 이후 그림 한 장당 가격이 10만원대 아래를 뚫은 뒤론 단가의 하한선도 없어졌다"고 했다. 또 "누구나 간단한 웹 디자인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상황이라 이제는 일러스트 시장 자체가 축소됐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부국장은 AI 등장으로 일러스트레이터 고유의 무기였던 '그림체', 즉 화풍이 무단 학습된다는 것도 문제점이라고 꼽았다. 그는 "누구나 '지브리 그림'이 무엇인지 알지 않나. 일러스트레이터에게 화풍은 고유한 브랜드인데, AI는 이걸 학습해 베낄 수 있다"며 "하지만 현행 저작권법상 화풍은 저작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일러스트레이터 입장에선 내 상품의 권리가 침해받고 있는데, 그 피해를 입증할 방법도 없다"고 지적했다.
김 부국장은 한국보다 먼저 AI와의 갈등 해결에 나섰던 해외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권익 보호 단체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조언했다.
미국에선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모여 2018년에 설립한 '콘셉트 아트 협회(Concept Art Association·CAA)가 AI와 일러스트레이터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CAA는 AI 때문에 일러스트 업계 일감이 줄고 있다고 판단,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의 412호 법안, 일명 'AI 저작권 투명성 법' 통과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해당 법안은 기업이 AI를 훈련할 때 특정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을 학습 데이터로 사용했는지 명확히 공개할 의무를 부여한다. 이로써 일러스트레이터는 자기 작품의 저작권이 침해됐는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 협회(Association of Illustrators·AOI)'가 AI의 일러스트레이터 권리 침해에 관한 연구를 수행해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김 부국장은 "한국에도 일러스트레이터 전체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권익 보호 단체가 필요하다"며 "학술 연구·공모전 개최 등을 주관하는 단체는 있어도 일러스트레이터의 권리를 보호, 주장할 수 있는 조직이 없다"고 지적했다.
일러스트 관련 자격증 발급·관리 업무를 하는 한국일러스트협회(KAOI) 관계자는 "협회 규모가 작아 자격증 관리라는 본업 외 권익 보호 등 다른 활동을 할 여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라며 "현재 국내에 일러스트레이터의 권리나 저작권을 보호하는 활동을 하는 독립적인 단체는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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