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에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소득세 과표구간 수치를 물가상승률에 자동으로 연동하는 ‘물가연동제’ 도입 필요성이 제시됐다. 물가가 상승해 명목임금이 오르는데도 과세표준 구간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조용한 증세’가 지속되어 왔다는 지적에서다. 그러나 정부와 학계에서는 한국의 세제 구조하에서는 물가연동제의 도입이 쉽지 않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물가와 연동시킬 세금의 범위를 두고 복잡한 쟁점이 얽혀 있어 도입 시 세법 체계의 전면적인 개편을 위한 첨예한 가치판단이 필요한 문제인데다가, 한국의 소득세 부담은 주요 국가에 비해 아직 낮은 수준이라는 판단에서다.
11일 정치권에 따르면 대선 당시 이재명, 김문수 두 후보가 제시했던 소득세 물가연동제 도입은 현재 추진되지 않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최종 공약집에서는 해당 내용이 제외됐다. 정부에서도 해당 제도의 도입을 세법 개정안에 반영하는 것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
물가연동제는 물가 상승에 따른 실질 세 부담 증가를 완화하기 위해 과세표준 구간이나 각종 공제제도 등을 물가 수준에 자동으로 연동시키는 방식이다. 납세자 입장에서는 물가로 인한 실질 세 부담 변동의 불확실성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수용도가 높을 수 있다.
2022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8개국 중 22개국이 소득세제에 물가연동제를 도입하고 있다. 다만 연동 방식은 국가마다 다르다. 뉴질랜드와 멕시코를 제외한 20개국은 소득세 과세표준 구간에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조정하고 있으며, 이 중 다수 국가는 공제 항목 중 최소 하나 이상도 함께 연동하고 있다. 특히 뉴질랜드, 멕시코, 슬로베니아, 튀르키예를 제외한 17개국은 과세표준뿐 아니라 공제제도까지 물가에 연동해 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만약 물가연동제를 도입한다면 물가 연동의 적용 범위를 결정해야 한다. 과세표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에 맞춰 조정할 것인지, 기본공제, 인적공제, 세액공제 등 각종 공제까지 함께 연동시킬지를 두고 정책적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 물가가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연동하도록 할 것인지, 자동적으로 물가와 소득이 연계되도록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근로소득에 있어서 매우 많은 공제를 하고 있는 구조인 만큼 과세표준만 연동시키면 진정한 의미의 물가연동제로 보기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공제의 연동 범위에 대한 결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공제를 물가와 연동시켜 적용할 때 사업소득세와 근로소득세 사이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근로소득에 대해 적극적인 공제를 적용해온 반면 사업소득자는 필요 경비에 대해 공제를 적용해 주는 방식이어서 공제 항목이 상대적으로 적은 구조다. 연동 기준을 세부 공제 내역으로 확대할 경우, 형평성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는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소득세에는 소득의 종류를 이자·배당·사업·근로·연금·기타소득과 양도·퇴직소득으로 구분하는 만큼, 연동 범위 결정에 따라 세법 전반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물가연동제의 경우 단순히 과세표준을 물가지수와 연동시킨다고 고치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세법 전반을 고쳐야 하는 민감한 사안”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소득세가 세수에 기여하는 성숙도가 아직 낮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성명재 홍익대학교 교수는 “물가연동제를 시행하는 것은 실효세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현재의 소득세제가 이상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며 “이상적인 수준은 소득세의 재정기여도, 소득 계층별 세 부담의 상대 비율이 적정해 공평성이 적정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소득세수는 GDP 대비 6.6% 수준이다. OECD 평균인 8.2%에 비해 낮은 편이다. 근로소득자 중 근로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는 면세자 비율은 2014년 48.1%에서 2023년 33.0%로 꾸준히 하락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미국 31.5%(2019년), 일본 15.1%(2020년), 호주 15.5%(2018년) 등 해외 주요국에 비해 높은 편이다. 소득세 산출 과정에서 소득공제와 세액공제가 다양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물가연동제 도입 전 각종 공제와 감면 제도를 정리하고 실효세율과 조세부담률을 끌어올리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성 교수는 "물가연동제 도입은 결코 단기간에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며 "적어도 최소한 5~6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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