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취약계층의 오래된 빚을 일괄 매입해 소각하는 '장기연체채권 채무조정 프로그램(배드뱅크)'에 4000억원 규모의 금융사 지원을 받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빠르면 3분기 중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금융사들이 배드뱅크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게 되면 이사의 충실 의무를 확대한 개정 상법에서 배임죄가 적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8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배드뱅크 소요 재원 8000억원 중 약 4000억원을 금융권에서 조달할 예정이다. 주요 시중은행이 상당수의 자금을 내고 금융투자와 보험, 저축은행, 여신전문금융회사 등 다른 금융사들도 일정 부분 자본을 댈 것으로 예상된다. 배드뱅크에서 매입, 소각할 연체채권의 상당수가 2금융권이 보유한 부실 여신인 만큼 이들에게도 일정 부분 기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금융위가 세부적인 프로그램 내용을 다듬어서 3분기 중에 이를 발표하고 구체적인 계획과 세부 실천 방안 등을 금융사들과 논의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실제 취약계층이 채무를 조정받기까지는 약 1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위 관계자는 "현재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고 있으며 재원 조달 방식이나 일정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금융사들의 배드뱅크 자금지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이번에 개정된 상법과의 충돌 우려도 나온다. 국회는 지난 3일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확대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지금까지는 이사의 충실 의무가 회사로 국한됐다면 이번 상법 개정안에서는 전체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이에 따라 향후 이사회가 중요한 경영 판단을 내릴 때 단순히 최대 주주나 회사뿐 아니라 소액주주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
금융권에서는 개정된 상법과 배드뱅크에 대한 자금지원이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배드뱅크에 대한 지원금 출연이 사회적 차원에서는 당연히 의미가 있지만 자칫 회사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고 이는 이사의 배임에 대한 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은행이 공공의 기여를 위해 지원금을 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회사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지는 고민이 되는 부분"이라며 "상법이 개정되면서 이에 대한 우려가 내부에서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은행의 공공성과 현행법과의 충돌은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4대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의 주택 담보인정비율(LTV) 담합 의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했다. LTV는 주택 가격 대비 대출 가능 금액의 비율을 의미한다. 공정위는 은행들이 정보 공유를 통해 LTV를 낮춰 잡아 담보보다 더 비싼 대출을 받도록 했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은행들은 위험관리 차원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졌던 일이고, LTV를 낮추면 거꾸로 대출 한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은행들이 담합할 유인이 거의 없다고 반박했다.
안정적인 가계부채 관리를 위해 LTV를 도입한 금융당국 역시 공정위의 조사가 불편한 상황이다. 당국은 공정위 제재가 LTV를 통한 금융시장의 안정 노력을 저해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이복현 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5월 "금융업의 특성상 필요한 금융 안정 조치가 경쟁 제한 논란을 촉발할 수 있고 반대로 경쟁 촉진 조치가 금융 안정과 소비자 권익을 침해할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 공정위 사례를 고려할 때 금융당국이 배드뱅크에 대한 금융회사의 자금지원에 방식에 보다 신중을 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배드뱅크 설립에 대한 다양한 논란이 있는 만큼 정부가 금융회사들과 충분히 논의해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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