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은 유교의 체제에서 벗어난 존재였기에 언제고 미움을 받는 존재였지만, 동시에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몸이 아프거나 사랑하는 이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위로는 궁궐에서부터 아래는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무당을 찾아 복을 빌고 나쁜 일을 쫓아내려 했다. 때로 무당은 세상의 전면에 나와 세상을 뒤흔드는 사건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1758년 황해도에서 생불, 그러니까 살아 있는 부처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다. 그 주인공은 황해도 금천의 여성이자 무당이었던 영매였다. 미륵불이란 아주 먼 훗날 중생을 구하러 나타난다는 구세주였다. 그 때문에 세상 살기가 힘든 사람들은 미륵불의 출현을 간절히 바랐고, 그러다 보니 자기가 미륵불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역사상 꽤 많이 있었는데 영매는 도 내의 다른 무당들을 모두 자신의 아래에 굴복시키기까지 했다.
"생불이 이미 왔는데, 어째서 신을 부르느냐?" 영매의 말을 들은 무당들은 자신들의 있던 칼과 방울을 버리고 팔아넘겼는데 그 무게가 1만냥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칼과 방울은 무당의 신기였으니, 즉 신을 버리고 영매를 따른 것이다.
이렇게 되자 조선 조정은 크게 당황했다. 유교의 나라인 조선에서 여성 미륵불이, 그것도 세 명이나 출현하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요녀의 말 한마디에 도 내가 다 휩쓸렸으니 보통내기 요녀가 아님을 알 만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영조는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영매를 중국과 맞서 싸운 베트남의 여걸들 쯩니, 쯩짝 자매에 비교했다. 칭찬하는 게 아니라 국가에 반역하는 여성의 사례로 든 것으로 그만큼 경계한 것이다. 처음에는 종교로 시작했다가 반란 세력으로 성장했던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어사를 직접 황해도로 파견해서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영매는 개경에서 체포당했다. 황해도를 돌며 포교하고 금강산으로 가려던 길이었다. 이미 영매의 소문은 널리 퍼져서 군관이 체포하는 데도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영매에게 합장하고 절했다.
"생불이니 칼로 쳐서 죽을 리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이윽고 복란대, 영지도 모두 잡혀 와 심문을 받았다. 조선의 법에서 백성들을 현혹하는 것은 사형에 처하는 중죄였다. 영매는 참형에 처했고, 복란대는 가혹한 심문을 이기지 못해 감옥에서 죽었으며 영지는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조선왕조의 빠르고도 과격한 대처로 미륵불 소동은 진압됐다. 혹은 그렇다고 한다. 기록에서는 진짜 미륵불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영매가 죽자 보통 사람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는 한다. 그러나 이 일의 보고서는 왕인 영조 앞에서 한 번 읽어본 뒤 바로 불에 태워졌다. 이 일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발로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보았고 들었으며 또 기록했다. 당시 황해도 이천부사로 지냈던 채제공은 당시 백성들에게 생불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들은 '미륵불이 복을 부르고 병을 잘 고친다는데 안 잡혀가기를' 그리고 '자신들이 사는 곳에 와주기를' 바랐다. 어째서 이런 생불 소동이 벌어졌는지, 사정을 따지기에 앞서 몹시 궁금해진다. 자신이 미륵불임을 외치고 황해도의 무당들을 호령한 자신만만한 여성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전에도 이후에도 수많은 자칭 미륵불은 있었지만 국가가 스스로 기록을 불태울 만큼 나라를 긴장시킨 여성은 또 없었다. 그만큼 불온하고도 신비한 사람이었다.
이한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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