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수탁자 책임·수급권 보호 강화해야"[기금형 퇴직연금]⑤

영미권서 보편화한 '수탁자 책임'
"의무 체계화하고 범위 명확해야"

美는 법적 기구서 기금 수급 보장
"부실 운영 출구 전략, 감독 필요"

모호한 기금 성격 재정의 과제도
"일관된 제도 설계와 추진 필요"

"기금형 지배 구조는 단순히 공격적인 운용으로 고수익만을 추구하는 기제가 아니다. 위험 조정, 수익 관점에서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수익률 제고 관점에서 논의되는 여러 정책 수단이 효율적으로 작동할 제도적 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제도 개편의 의의가 있다."(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30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 노인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30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 노인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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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하면 현행 퇴직연금 제도의 구조적 한계를 개선할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도입 자체가 곧바로 수익률 향상과 노후 소득 보장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금형 도입을 위한 법안 마련과 함께 제도를 뒷받침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수탁자 책임과 수급권 보호를 강화하면서 장기 운용 기반 등을 닦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 조언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노사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기금운용위원회가 기금 운용 방향을 정하고, 이를 수탁 법인이 시행하도록 하는 제도다. 적절한 자산 배분 전략을 세워 손실 위험을 줄이면서도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핵심 과제로 꼽힌다. 다만 투자 문법상 고수익을 바랄수록 손실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다. 수탁 법인의 도덕적 해이 등으로 부실 운용이 생길 수도 있다. 영미권 유사 제도를 참고해 수탁자 책임과 수급권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보험연구원은 2022년 발표한 '퇴직연금 지배구조 개편 논의와 정책방향' 보고서에서 "영·미의 기금형 지배 구조에서는 수탁자 책임을 구체적이고 명확히 설정해두는 경향이 있다"며 "기금형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들 국가에서 규정하는 수탁자 책임 수준에 준하는 충실 의무, 주의 의무, 자산관리 의무, 정보관리 의무를 체계화하고 범위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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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상명대 글로벌금융경영학부 교수(전 한국연금학회장)는 "수탁자 책임이 신탁 제도에서 비롯했고 신탁은 영미법에서 시작한 것"이라며 "영국에서 수탁자 책임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뒤 미국하고 호주에서 도입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미권에서 수탁자 책임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규정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기금형 도입에서 핵심 포인트가 될 것"이라며 "정부에서 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홍경식 한국퇴직연금개발원장은 "일본에서는 후생연금기금을 운영하다가 실패하면서 제도를 폐지한 사례가 있다"며 "우리도 수익만 생각할 게 아니라 부실 운영에 대한 출구 전략이 뭐가 있을지, 기금 관리와 감독을 어떻게 할지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미국은 연금지급보증공사(PBGC)라는 법적 기구가 있고, 부실화한 기금이 있으면 근로자에게 대신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둔다"며 "관리 감독과 (수급권) 보장 장치 등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일본에서는 2012년 후생연금기금 자산을 위탁받아 운용하던 AIJ가 잘못된 투자와 수익률 조작으로 자산의 90% 손실을 입힌 사건이 있었다. 일본은 이후 수탁자 규제와 감독 체계를 강화하고 연금 제도를 개편했다. 영국에서는 1991년 언론 재벌인 로버트 맥스웰이 복수 계열사의 퇴직연금기금을 사업 자금으로 무단 전용해 총 4억파운드의 손실을 일으킨 바 있다. 이후 영국은 수탁자 책임을 강화하는 연금법을 제정하고 연금 감독 기구를 신설했다.


안정된 기금 운용을 위해 가입자가 퇴직연금을 장기로 유지하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퇴직연금 중도 인출을 법적으로 제한하고 담보 대출을 도입하는 식이다.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 옵션) 확대도 요구된다. 기금형 초기 정착을 위한 세제 혜택과 관리 수수료 지원 등의 재정적 뒷받침도 함께 언급된다. 퇴직연금의 성격을 명확히 정의하고 일관된 제도 설계를 해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남 위원은 "퇴직연금은 법에 따라 강제로 시행되는 법정 필수 연금인데 사적 연금으로도 분류가 된다"며 "퇴직연금이 양쪽에 걸쳐 있다 보니 정부가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퇴직연금) 중도 인출을 법으로 막으면 사적 연금이고 개인의 사적 재산인데 이를 국가가 제한하는 게 위헌이라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라며 "퇴직연금을 분류한 뒤 정부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종=김평화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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