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통상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우리 정부의 협상 전략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이 철강 등 전략 품목에 대해 고율 관세를 '상수'로 가져가겠다는 방침을 공고히 하면서 정부는 기존의 '철회' 요구에서 한발 물러나 '공존'과 '확대 균형' 전략으로 협상 기조를 전환했다. 고관세 기조 자체를 국제 통상의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실익을 극대화하려는 실용주의적 접근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고관세를 전제로 한 국제통상 환경이 뉴노멀화되는 상황"이라며 "한국은 철회를 관철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실익을 낼 수 있는 현실적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수세적으로 방어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새로운 협력 지형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정부는 이번 협상에서 관세 자체보다는 비관세 장벽 해소와 제조업 협력 확대를 핵심 의제로 삼고 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이후 일관되게 강조해온 '제조업 부흥' 기조를 정면으로 인식하고, 여기에 한국이 어떻게 파트너로 기여할 수 있을지를 주된 접근 지점으로 보고 있다.
실제 산업부는 '확대 균형'이라는 키워드를 협상 전략의 기조로 내세우고 있다. 단기적 무역수지 흑자 방어보다는 미국이 중시하는 고용·투자·재정 등 구조적 요소에 한국이 실질 기여를 한다면 기존 관세 장벽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이익의 접점은 넓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한국 기업의 미국 내 투자 확대는 그 대표적 카드다. 미국 내에서의 생산은 현지 고용 창출과 세수 확보로 연결되고, 여기서 생산된 제품을 제3국에 수출할 경우 미국의 대외 무역적자 완화에도 긍정적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처럼 관세를 둘러싼 '제로섬 게임'을 피하고 '상호 기여 구조'로 나아가려는 것이 정부의 실용 전략이다.
이러한 기조는 지난달 24~26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의 제3차 한미 기술 실무협의에서도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이끄는 협상단은 기존 1·2차 협의에서 미국 측의 요구사항 파악에 중점을 뒀다면, 이번 협의에선 한국 측의 대응 여지를 본격적으로 구체화했다.
정부는 오는 8일 협상 시한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일괄 타결이 아니라 국가별 유예, 부분 타결, 협상 지속 등 다양한 경로가 가능하며, 실질 협상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실제 통상 당국 관계자들도 "이번 협상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며 "협상을 결렬 없이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각국을 향해 "7월8일까지 협상이 끝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고 공언했지만, 이 또한 전형적인 트럼프식 협상 압박 전술로 보인다. 특유의 '선 긋기'로 상대방에게 더 많은 양보를 끌어내려는 메시지에 가깝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통상 패턴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최종 시한을 앞두고 복수 국가에 예외나 유예를 허용했던 사례가 적지 않다.
지금의 통상환경은 '관세 철폐냐 유지냐'의 이분법을 넘어서고 있다는 게 우리 정부 내 보편적 시각이다. 미국은 관세를 통상 압박의 수단이자 산업 정책의 수단으로 동시에 활용하고 있고, 여기에 대응하는 한국의 전략도 장기적인 틀에서 구사하겠다는 것이다. 7월8일은 하나의 마감일일 뿐 진짜 협상은 그 이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철회'라는 단어를 내려놓은 이유는 오히려 더 나은 협상 조건을 주도하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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