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K열풍의 진원지를 취재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를 찾았다. 쇼핑 명소 구광백화점 1층 화장품 매장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한국 화장품 기업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와 LG생활건강의 '후'를 사기 위해 몰린 중국 소비자들이었다. 인근 난징둥루의 800㎡ 규모 이니스프리 플래그십 스토어 역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하루 방문객이 5000명에 달한다"는 직원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당시 아모레퍼시픽은 중화권, 아세안, 미주를 3대 축으로 삼아 해외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다. 전체 매출의 4분의 1을 해외에서 올렸고, '설화수'는 국내 화장품 브랜드 최초로 연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이니스프리'와 '후'도 잇달아 '1조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적 뷰티 전문지 WWD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뷰티 기업 순위에서 아모레퍼시픽은 샤넬을 제치고 7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야말로 K뷰티의 전성기였다.
K푸드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CJ제일제당의 '비비고 만두'는 2020년 미국 시장에서 'K만두 신드롬'을 일으켰고, 단일 품목으로 글로벌 매출 1조 원을 달성했다.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은 '매운 라면 챌린지(Fire Noodle Challenge)' 열풍을 타고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불닭 브랜드의 글로벌 매출은 1조2100억 원에 달했고, 이 중 70% 이상을 해외에서 거뒀다. 미국, 중국, 동남아는 물론 유럽과 중동까지 진출하며 'K스파이시'라는 새로운 문화 코드를 형성했다. 화장품과 푸드 수출액은 올 상반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성장은 단순한 품질 경쟁력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강력한 문화 콘텐츠, 곧 K컬처의 힘이 있다. 드라마, 영화, K팝 등 은 한국 제품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한국 제품은 이제 '신뢰할 만한 외국 제품'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고 싶은 트렌드'가 됐다. BTS가 광고한 화장품을 써보고 싶고, 드라마 속 주인공이 먹던 음식을 구매하는 것이 해외 소비자들에게 더는 낯선 일이 아니다.
지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CJ의 문화 페스티벌 '케이콘(KCON)'은 이 흐름을 보여준 무대였다. 이틀간 14만 명이 행사장을 찾았고, CJ제일제당이 운영한 만두·떡볶이 부스에는 긴 대기 행렬이 이어졌다. 문화와 소비재의 결합이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산업 성장의 핵심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 현장이었다.
문화는 가장 유연하게 국경을 넘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가 말한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강제력 없이 타인의 선택을 이끌어내는 힘을 뜻한다. 한국의 문화 콘텐츠는 국가에 대한 신뢰와 호감을 높이고, K브랜드를 세계 소비자의 일상 속에 스며들게 했다. 이는 소프트 파워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새 정부는 문화 산업을 국가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약을 통해 2030년까지 문화시장 규모 300조 원, 수출 50조 원 달성을 제시했다. 대통령 직속 'K콘텐츠위원회(가칭)' 설치도 거론된다.
방향은 맞다. 그러나 선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화 콘텐츠에 대한 투자는 단순한 예술 지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콘텐츠, 소비재, 유통, 서비스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산업 생태계를 설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문화·소비재 스타트업에 대한 펀드 조성, 문화·식품·패션 기업 간 협업 기획 촉진, 글로벌 커머스 플랫폼과의 연계 프로그램 구축 등의 실질적인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 했다. 한국 문화 콘텐츠의 세계적 확산은 기회다. 이 흐름을 지속 가능한 산업 성장으로 이어갈 전략이 필요하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