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약업계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한국과의 무역 협상을 지렛대 삼아 약가 정책 개선을 요구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 정부가 미국산 의약품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춰 미국 제약사의 혁신 신약 개발에 '무임승차'했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미국제약협회(PhRMA)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한국을 비롯해 호주,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 영국 및 유럽연합(EU) 등 미국을 제외하고 혁신 신약 지출 비중이 높은 9개국을 불공정 국가로 지목하고 시정 조치를 요구했다.
케빈 헤닌저 PhRMA 부사장은 의견서에서 ▲나라별 공공 약가 규제 방식과 ▲공공 보험 지연 적용을 주된 문제로 지적하면서 "해당 국가들이 미국의 바이오의약품 개발 혜택은 누리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을 향해서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HIRA)과 국민건강보험공단(NHIS)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평가 절차로 인해 제약사가 환자 접근까지 상당한 지연이 발생한다"며 "생명 연장 1년당 금전적 기준은 2007년에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수준에 맞춰 설정된 이후, GDP가 2배 이상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갱신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같은 의도적인 약가 억제 관행 때문에 한국이 고소득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신약 관련 예산 비중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됐다는 주장이다.
제약업계가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낸 배경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중 정책이 있다. 비싸기로 악명 높은 미국 약값 낮추기에 나서면서 자국 제약업계를 옥죄는 한편, 외국 정부 불공정 약가 정책을 낮춰주는 '당근책'을 선물한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제약사는 신약 개발 과정에서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부담하고 있지만, 외국에서는 약을 싸게 판매하다 보니 결국 미국이 타국의 약값을 보조하는 셈이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난달 12일에는 외국 정부가 국내 약가를 시장가 이하로 인위적으로 설정해 미국 내 약값 인상을 막는 것을 방지하도록 USTR과 상무부에 지시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이번 성명 역시 외국 정부의 불공정한 약가 정책에 대한 USTR 조사 일환으로, 지난달 30일 기준 USTR 웹사이트에는 총 58건의 의견서가 접수됐다.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휴미라'와 건선 치료제 등 다양한 혁신 신약을 보유한 애브비는 개별 의견서에서 한국을 문제 국가로 지목하고 "불투명한 약가·급여 결정 방식은 혁신 가치를 훼손한다"며 2026년 말까지 한국 정부가 제약 가치 평가 시스템을 개선하도록 조치하라고 USTR에 별도로 촉구했다. 바이오시밀러 등 특허 기간 연장제도 운영 방식 역시 2012년 체결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펼쳤다.
미국 최대 경제단체인 미 상공회의소는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약가를 지나치게 낮게 책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미국 제약 및 바이오 기업이 신약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미제조업협회(NAM)는 현재 진행 중인 무역 협상을 지렛대로 삼아, 타국이 미국 기업의 지식재산권을 보호하고 공정한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국 바이오산업협회(BIO)는 한국의 약가 제도가 미국 제조업체의 경쟁력과 지속 가능성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만 한국 입장에서는 억울한 부분이 있다. 국내 약가 결정 과정에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해외 의약품일 경우, 제약사의 신약 급여 적용 신청→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 등재 여부 심사→통과 시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제약사 간 약가 협상 등을 거친다. 건강보험 정책 최고 심의기구인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그 결과를 최종 심의한다. 실제 약가 협상은 1회인 셈이다.
한편, PhRMA는 미국 내 약값 부담을 줄이기 위해 외국 중 가장 낮은 가격을 적용하는 '최혜국(MFN) 약가 제도' 도입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며, 이는 투자와 신약 개발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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