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 헌법 84조와 '72자(字) 판결문'

"헌법 84조에 따라" 한마디뿐인
법원의 李대통령 공판 중단 이유
법해석 기관 임무 저버린 것 아닌가

[시시비비] 헌법 84조와 '72자(字) 판결문' 원본보기 아이콘

법조 현장을 취재할 때 어느 판사의 '72자(字) 판결문' 기사를 쓴 일이 있다. 법률 전문지에서 변협이 회원의 판결문 관련 진정을 대법원에 냈다는 토막 기사를 읽고, 수소문 끝에 진정인(변호사)을 찾아갔다. 2900만원 대여금 소송을 맡았던 변호사가 내놓은 문제의 판결문을 살펴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판결문은 의뢰인의 입장을 담아 변호사가 제출한 재판 준비서면을 따 붙여 '별지(別紙)'라고 해놓고, '원고는 별지와 같이 주장하나, 달리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식이었다. 판결 이유에 '판결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당사자 주장과 판단 근거를 담으라'는 민사소송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처럼 성의 없는 판결 이유는 도합 일흔두 글자. 그래서 '72자 판결문'이 된 것이다.

판사와 한동안 전화로 주고받았다. "판결에 이유가 있어야 당사자가 납득하지 않을까요?"(기자) "원래 소액사건은 이유 안 써도 됩니다."(판사) "소송액을 보니 소액이 아니라 중액사건이던데요?"(기자) "판결문 간이화 차원에서 간략하게 하느라…."(판사) "간이화는 쉽게 쓰라는 거지, 쓰지 말라는 게 아닐 텐데요."(기자)…. 판사는 "심리는 충실하게 했다"고 했지만, 기자는 믿을 수 없었다.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은 현직 대통령의 재판 계속 여부를 놓고 법원이 보여준 모습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대통령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은 일제히 재판 중단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 이유가 "헌법 제84조에 따른 조치입니다", 딱 열세 글자였다. 이걸 보며 십수 년 전 '72자 판결문'을 취재할 때의 느낌을 떠올렸다면 기자가 지나친 걸까.


'현직 대통령은 내란·외환죄를 빼고는 재직 중 형사상 소추(訴追)를 받지 않는다'고 규정한 헌법 84조의 해석은 대선 내내 국민적 관심거리였다. 헌법 84조의 '소추'가 검찰 기소에 한정되느냐, 재판까지 포괄하느냐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법학 교수들도 의견이 갈렸다. 물론 헌법에 이 조항을 넣은 입법 취지(대통령의 원활한 직무 수행을 위해서라는)까지 감안하면 재판 역시 중단된다는 게 다수설에 속하고, 기자 역시 그 의견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의견을 가진 국민도 얼마든 있을 수 있다. 결국 최종 법 해석 권한을 가진 법원의 입을 쳐다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법원의 응답이란 "헌법 84조에 따라" 결정했으니, 이유는 알아서 짐작하시라는 것이다. '원고는 별지와 같이 주장하나 이유 없다'던 72자 판결문과 무엇이 다른가.

기자는 법원이 살아 있는 권력의 서슬에 놀라 풀보다 먼저 누웠다고 손가락질하고 싶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무조건적 석방' 결정을 내린 미국 판사는 7분30초에 걸쳐 그 이유를 소상히 설명했다고, 굳이 비교하고 싶지도 않다. 오로지 법원의 설명을 듣고 싶은 국민에게 '알아서 해석하시라' 해 버린 불친절함과 무성의함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판결에 대한 승복률이 낮다. 항소, 상고로 이어지는 상소율이 높은 것은 '끝까지 가보자'는 국민성 탓도, 대한민국이 재판받을 권리를 완벽하게 보장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왜 재판에 졌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다'는 소송 당사자의 소박한 바람 때문인 것이다. 그 바람을 지켜주는 일은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소명(召命)이다.





이명진 사회부장 mjlee7@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