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박하사탕 나도 살래"…'핫플'된 거대한 폐석 더미는 운동화 닳도록 뛰는 '트래킹 명소'②

[정의로운 전환의 길]
Ⅱ.탈석탄 과정서 갈등 해소, 어떻게 가능했나
佛 랑스, 폐석 더미→트레킹 명소
英 런던, 화력발전소→현대미술관·쇼핑몰

편집자주산업혁명 발상지 영국은 2024년 가을 마지막 남은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하면서 142년 석탄발전 역사를 마감했다. 프랑스는 2027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전체를 폐쇄할 계획이다. 유럽 최대 석탄 생산국 폴란드도 최근 탈석탄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선택한 탈석탄 정책이 일자리 감소와 지역 소멸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영국·프랑스·폴란드 정부와 기업은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탈석탄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전환의 성공 사례를 취재했다.

'석탄 때문에 활기가 있었던 지역 경제를 탈(脫)석탄 후 어떻게 살릴 것인가'는 탈석탄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의 가장 큰 고민이다. 석탄 광산, 화력발전소 등이 문을 닫으면서, 노동자와 관련 시설이 빠져나가 지역이 텅 비어버리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더 이상 화력발전소는 가동하지 않지만, 남겨진 폐광과 발전소를 활용해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이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전환' 덕분이다.

프랑스 석탄마을, 폐석 더미를 트레킹 명소로 전환

프랑스의 옛 석탄 도시 랑스에 위치한 마을 루앙고엘(Loos-en-Gohelle)은 광부들이 쌓아 올린 폐석 더미를 트레킹 명소로 만든 이후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랑스 기차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10분쯤 들어가면 병풍처럼 펼쳐진 거대한 검은 산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1960~1970년대 광산에서 채굴하고 남은 폐석 더미다. 폐석 더미를 관광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지자체와 주민들이 오래도록 힘을 합친 덕분이었다.

프랑스 랑스 루앙고엘에서 보이는 폐석 더미. 현재는 트레킹 명소가 됐다. 전진영 기자.

프랑스 랑스 루앙고엘에서 보이는 폐석 더미. 현재는 트레킹 명소가 됐다.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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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랑스는 하루에 광부 5000명이 6000t의 석탄을 채굴할 정도로 석탄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프랑스 석탄공사가 도시 전체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화력 발전소를 신재생에너지 발전소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석탄이 더 필요 없어졌고, 석탄 도시는 쇠락해 순식간에 고요함이 감도는 적막한 지역이 됐다.


석탄 발전소와 탄광 부지를 매각해 새로운 산업을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당시 지자체장과 주민들은 정반대의 노선을 택했다.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발전을 이끌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1984년 폐광으로 삭막해진 마을 분위기를 바꾸자는 의미로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마을 축제 '고엘리아드(Gohelliades)'가 시작됐다. 축제는 점차 진화해 탄광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참여형 연극과 음악 공연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자체는 이런 문화자본을 구축하는 데서 마을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지자체는 먼저 주민과 협의를 통해 헐릴 뻔한 석탄 가공 시설을 '11/19 기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숫자는 보존한 갱도 번호로, 11번과 19번 수직갱도를 의미한다. 창고는 예술가들이 공연하고 워크숍을 여는 실험실과 영화관으로 개조해 젊은 예술가의 유입을 유도했다.

석탄 가공 시설을 살려 만든 11/19 기지. 전진영 기자.

석탄 가공 시설을 살려 만든 11/19 기지.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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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석 더미를 활용할 방안도 고안했다. 먼저 이를 철거하지 않고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등산로를 정비해 트래킹 명소로 이를 홍보했다. 그리고 매년 5월 '검은 피라미드 트레일(Trail des pyramides noires)' 러닝 대회를 개최해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총 110km, 22개의 폐석 더미를 넘나들며 달리는 대회로 광부들의 연대 정신을 되새기자는 취지다.

탄광도시만의 기념품도 있다. 랑스 기차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관광센터에서는 석탄을 싣는 봉투, 랑스 지역의 석탄 산업과 관련된 각종 책, 석탄을 가공하는 기지 모형 등을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다. 특히 '광부의 사탕(La pastille du mineur)'으로 불리는 박하사탕이석탄 도시의 추억을 되새기는 관광상품으로 인기다. 메탄가스가 나오는 탄광 안에서 광부들이 흡연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흡연 욕구를 줄여주기 위해 유칼립투스와 박하를 넣어 만든 사탕이다. 심지어 모양도 타원형에 검은색으로, 석탄 덩어리와 닮았다.

프랑스 랑스에서 판매하는 석탄과 탄광 관련 기념품들. 전진영 기자.

프랑스 랑스에서 판매하는 석탄과 탄광 관련 기념품들.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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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50년을 살았다는 11/19 기지 관계자 실비씨는 "발전소가 문을 닫은 뒤 이곳은 한낱 시골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캐나다, 벨기에, 심지어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견학하러 방문하는 곳이 됐다"며 "기지도 영화관 등으로 바뀌면서 시골 주민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고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장소와 환경 의미 되새긴 미술관 테이트 모던

영국 런던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은 1962년 착공된 뱅크 사이드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공간이다. 런던 시내 5분의 1에 전력을 공급했던 뱅크 사이드 발전소는 석유 가격 급등으로 단가를 맞추지 못하자 1981년 문을 닫았다.


폐허로 남은 발전소는 1993년 런던시의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 대규모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2000년을 맞아 '런던 아이'로 불리는 밀레니엄 휠, 그리고 세인트폴 성당과 템스강 남북을 잇는 '밀레니엄 브리지' 등 여러 도시 재생을 위한 요소를 설치했다. 테이트 모던도 이 공공 프로젝트 속에서 탄생했다.


테이트는 이 시기 현대미술관을 만들기 위한 부지를 찾고 있었고, 런던시는 쓸모 없어진 문 닫은 화력발전소를 제시했다. 테이트는 1997년부터 미술관 개조를 시작한다. 사우스워크 구청은 개발 계획 승인을 위한 지역 주민 설득에 앞장 섰다. 지자체와 민간 예술 자본이 결합해 만든 시너지다.

발전소의 석유 탱크를 개조한 테이트 모던의 전시공간 '더 탱크' 전경. 전진영 기자.

발전소의 석유 탱크를 개조한 테이트 모던의 전시공간 '더 탱크' 전경.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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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은 기존 화력발전소의 공간을 고스란히 남겼다. 먼저 터빈이 있던 곳은 관광객이 입장해서 처음 맞게 되는 '터빈 홀'로 변모했다. 얽히고설킨 검은 철골 구조와 굴뚝을 그대로 살려 이곳이 과거 발전소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석유를 저장했던 탱크는 라이브 아트와 비디오, 오디오 상설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재활용했다. 소리가 울리는 석유 탱크의 특성을 살려 오디오를 활용하는 전시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기자가 방문한 6월에는 조각가 자코메티의 2차 세계대전 이후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자코메티 조각상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는 아직 냄새가 다 빠지지 않은 석유 탱크의 캄캄하고 어두운 공간과 맞물려 몰입감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재활용한 발전소'는 미술관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테이트 모던은 '게더링 그라운드(Gathering ground)'라는 상설 전시관을 마련했다. 전시관 설명에는 이곳이 화력발전소를 재활용해 만든 건물임을 설명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지탱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위협받는 생태계를 돌아보는 전시들로 구성했다"고 언급했다.


테이트 모던 '게더링 그라운드'에 전시된 압베스 자헤디의 작품을 관람객들이 구경하고 있다. 폐알루미늄 등으로 만든 파이프를 기존 발전소 건물에 있던 파이프에 연결하고, 공명을 통해 불규칙적으로 소리가 나게 만들었다. 관람객이 직접 바닥에 앉아 파이프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한 참여형 전시다. 작가는 매달 토요일 이곳에서 생태계의 의미를 되살리는 모임도 주최하고 있다. 전진영 기자.

테이트 모던 '게더링 그라운드'에 전시된 압베스 자헤디의 작품을 관람객들이 구경하고 있다. 폐알루미늄 등으로 만든 파이프를 기존 발전소 건물에 있던 파이프에 연결하고, 공명을 통해 불규칙적으로 소리가 나게 만들었다. 관람객이 직접 바닥에 앉아 파이프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한 참여형 전시다. 작가는 매달 토요일 이곳에서 생태계의 의미를 되살리는 모임도 주최하고 있다.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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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환경 대폭 개선…주민 자랑 된 배터시 화력발전소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영국 런던 배터시 발전소 전경. 전진영 기자.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영국 런던 배터시 발전소 전경.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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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가동을 멈췄지만, 관광객이 몰려드는 핫 플레이스 중 하나다.


기자가 방문한 지난달 11일,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현장 체험학습을 온 아이들, 데이트하러 온 사람들로 내부는 꾸준히 붐비는 모습이었다. 공용 피아노가 있어 아이들이 자유롭게 연주하는 소리가 터빈 홀에 흘러나왔다. 템스강 남쪽에 위치한 이 발전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벽돌식 건물로 불렸다. 그러나 1983년 가동을 멈추고 내부 설비가 빠진 뒤부터는 관리가 되지 않아 사실상 폐허로 방치됐던 곳이었다. 심지어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아예 발전소를 허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여러 번 부지 매각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면서 발전소 인근은 낙후됐다.


이곳이 화려하게 재탄생하게 된 데에는 지자체와 민간의 협력이 컸다. 2010년 런던시는 이 일대를 '기회 지역'으로 지정하고 민간 개발 사업자를 적극 유치했다. 2012년 말레이시아 국부펀드가 발전소를 사들이게 됐는데, 이때 런던시와 완즈워스 구의회는 지하철 연장, 공공주택 건설 조건을 내거는 등 이익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 구의회도 교통망 연결을 계획하고 자금 조달에 나섰다.

배터시 발전소의 컨트롤룸. 원래는 제어장치가 있던 곳이지만 음료를 파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전진영 기자.

배터시 발전소의 컨트롤룸. 원래는 제어장치가 있던 곳이지만 음료를 파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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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자체와 민간 사업자의 긴밀한 협력 덕분에 낙후 지역이었던 배터시는 레저와 상업, 식음료장을 모두 갖춘 멀티플렉스로 재탄생했다. 재건 과정에서 옛 발전소 기둥에 둥지를 틀고 살던 송골매를 보호하기 위해 공사 기간 중 임시 둥지를 만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생태계 보호의 아이콘으로도 거듭났다. 특히 배터시 발전소를 중심으로 주거단지와 상업시설을 함께 조성하는 도시 재생계획 덕분에, 부지 인근은 새롭게 단장된 부촌이 됐다.


골칫덩어리던 발전소는 어느새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는 존재가 됐다. 배터시 관계자 해리는 "방문객의 90% 이상이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며 "주민들 역시 이곳이 과거 석탄발전소에서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상업시설로 변모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까지 갖고 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곳이 박물관으로 남길 바랐던 사람들밖에 없다"라고 귀띔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시커먼 박하사탕 나도 살래"…'핫플'된 거대한 폐석 더미는 운동화 닳도록 뛰는 '트래킹 명소'② 원본보기 아이콘




랑스(프랑스),런던(영국)=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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