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정부는 지난달 말 비트코인 채굴·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남는 전력 2기가와트(GW, 1GW는 1000MW)를 배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초과 생산한 전력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전력 소모가 많은 비트코인 채굴산업을 적극 활용하기로 한 겁니다.
파키스탄이 에너지 집약 시설로 손꼽히는 비트코인 채굴·데이터센터에 할당한 2GW 전력은 일반적인 가정집 150~200만곳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양입니다. 파키스탄 정부의 이번 전력 할당을 가상화폐 투자 지원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남는 전기를 효율적으로 활용해 전력망 안정화를 꾀하고 떠오르는 산업군의 일자리를 확보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현재 파키스탄은 과도한 전기 생산량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파키스탄 정부 소속 경제조정위원회(ECC) 공식 자료에 따르면, 파키스탄 내 설치된 태양광 패널 숫자는 지난해 말 28만3000개를 기록했습니다. 6개월 사이 2배로 불어난 수치이며, 발전 용량으로 따지면 4.12GW에 육박합니다.
파키스탄의 송전선은 그대로인데 갑자기 늘어난 태양광 발전 시설로 공급되는 전력량이 갑자기 늘면서 전력망은 불안정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단전 현상이 빈번해졌고 전력 생산이 많아졌음에도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전기 요금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통상 전력망은 실시간 수요와 공급을 일정하게 맞춰야 주파수와 전압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공급이 늘어나면, 전기의 주파수가 확 뛰어올라 송·배전망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도 태양광 시설의 발전량이 불안정해지면서 주파수 변동이 극심해진 게 주원인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남는 전기가 너무 많아 전기요금이 비싸지는 역설적인 상황을 마주한 파키스탄은 비트코인을 전력망 안정 수단으로 사용하는 셈입니다.
사실 비트코인을 전력망 안정 대책으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오래됐습니다.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의 가장 큰 취약점은 발전량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따라서 발전량이 갑자기 폭증하는 구간에 전기를 분산할 수단이 필요한데, 이때 대량의 비트코인 채굴기를 가동하면 전력을 소모하는 동시에 가상화폐를 얻을 수 있지요.
가상화폐의 가치가 불안정하다고는 하지만, 발전 시설 가동을 멈추거나 송·배전망이 망가지는 것보다는 훨씬 매력적인 대안입니다. 이같은 전략을 '비트코인을 통한 에너지 부하 관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비트코인 부하 관리는 최근 민간 영역에서 활발히 시도되고 있습니다. 텍사스의 풍력 발전, 아이슬란드의 지열 발전, 캐나다의 수력 발전 모두 비트코인 채굴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비트코인 업계는 "비트코인 부하 관리는 신재생 에너지 효과를 보장할 수단"이라며 "전력망 피크 시간(전력 공급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대)에 부담을 완화할 수 있고, 추가적인 수입원도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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