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가 저소득 자영업자와 장기 연체자 등 취약계층의 본격적인 채무 탕감에 나선다. 경기가 수년째 나빠지면서 빚을 갚지 못해 사회적인 재기의 기회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성실히 빚을 갚고 있는 사람들과의 형평성 문제라든지, 아예 채무자들이 빚 상환을 멈추는 등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가능성도 우려된다.
20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는 장기 연체채권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신설해 상환 능력을 상실한 장기 연체 채무자의 빚을 탕감할 계획이다. 추가경정예산(추경) 등으로 마련한 정부 재정과 금융권 자금 등 총 8000억원을 투입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산하에 채무조정기구(배드뱅크)를 설치하고,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원 이하의 개인 무담보채권을 일괄 매입하는 방식이다. 예상되는 총 매입채권 규모는 16조4000억원이며, 113만명이 수혜를 입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또한 7000억원을 투입해 소상공인·자영업자 채무조정 프로그램인 새출발기금을 강화한다. 기존보다 원금 감면 대상을 확대해 저소득 자영업자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저소득 소상공인 10만1000명이 수혜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저소득 연체 소상공인의 약 40%에 해당하는 규모다.
정부가 이처럼 대규모 재정을 동원해 취약계층의 빚 탕감에 나선 것은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갈수록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취약차주는 2022년 말 178만명에서 올해 1분기 말 188만명으로 줄어들기는커녕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취약차주는 다중채무자이면서 저소득 또는 저신용자를 의미한다.
전체 취약차주 중에서도 자영업자의 비중은 더 빠르게 증가 중이다. 국내 자영업자 차주 중 취약차주는 작년 말 기준 42만7000명으로 2023년 말 39만6000명에 비해 3만1000명 늘었다. 불과 1년 사이에 7.8%나 증가할 정도로 상황이 나쁘다는 평가다. 취약 자영업자의 은행 대출 연체율은 11.16%로 일 년 사이에 2.26%포인트 급등했다.
자영업자 내에서도 소득양극화가 더욱 심화해 저소득 자영업자는 소득감소로 인한 부담이 가중됐다. 올해 1분기 자영업자 가구의 월평균 소득 증감율을 보면 소득이 가장 낮은 1분위는 전년 동기 대비 5.4% 감소한 반면 가장 높은 5분위는 2.7% 증가했다.
정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재기의 기회를 제공하고, 우리 사회의 통합 차원에서라도 이번 지원 대책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에도 내수 회복이 지연됨에 따라 자영업자 채무가 늘어나고 상환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며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느라 불가피하게 늘어난 채무에 대해 재정이 책임을 공유할 필요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기 연체자의 경우에는 금융뿐만 아니라 근로활동, 주거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큰 곤경에 처하게 돼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소상공인들 역시 정부의 이번 대책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소상공인연합회는 "정부의 이번 대책으로 최대 143만명의 소상공인이 그동안 짓눌려온 부채의 짐을 상당 부분 해소하고 새 출발에 나서게 될 전기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다만 정부의 이번 정책이 실현된다면 그동안 성실히 빚을 갚아온 사람들과의 차별 논란은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책임감을 가지고 빚을 상환해온 채무자가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대책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빚 상환을 늦추는 차주가 증가하는 등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도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파산에 준하는 수준으로 상환능력을 상실한 연체자만을 엄격하게 선별해 지원할 것"이라며 "누구나 장기 연체자가 될 수 있고, 사회 통합과 약자에 대한 재기 기회 제공 차원에서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다양한 도덕적 해이 방지 장치들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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