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불편한 영화를 봤다. '벼랑 끝에 서서'라는 영화를 망설임 없이 선택한 이유는 믿고 보는 배우 '타라지 헨슨'이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지나치게 단순하고 안일한 대비 구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흑인 여성은 무고한 피해자이고 백인 남성은 악질적인 가해자로 나온다. 관리자는 대놓고 착취하고 노동자는 속절없이 착취당한다. 철없는 젊은이와 현명한 노인이 대비된다. 심지어 경찰 중에서도 능력과 배려심을 갖춘 흑인 여성 형사와 무능하고 무신경한 백인 남성 형사가 충돌한다. 그런데도 나는 푹 빠져서 영화를 봤고 눈물까지 흘렸다. 온전한 거처도 안정적인 직장도 없는 가난의 낭떠러지에서 어떻게든 아이를 지켜내려는 엄마의 절실함이 진부하고 노골적인 설정을 덮고도 남기 때문이다. 별 5개 만점에 3개는 줄 수 있다.
이 영화와 매우 비슷한 상황에 놓인 모녀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담아낸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도 있다. 역시 주거와 수입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엄마와 딸이 나오는데 동화 같은 톤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포스터만 봐도 정반대. '벼랑 끝에 서서'가 비장하고 어두운 사진인 것과 반대로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파스텔 그림 같다. 어쨌든 영화 속 모녀의 앞날이 암울한 건 매한가지.
화사한 포스터와 '행복해질 준비 됐나요?'라는 카피에 혹해 가족과 함께 이 영화를 보다간 마약과 성매매를 비롯한 적나라한 장면들에 화들짝 놀랄 수 있다. 아, 영화는 정말 좋다. 저예산 독립영화가 이뤄낼 수 있는 최대치를 이루었다. 별 5개 만점에 4개.
생존이 위태로운 극빈층 가족을 다룬 우리나라 영화로는 '기생충'이 압권이다. 반지하 방에 살다가 부잣집 지하실에 기생하게 된 대한민국 어느 가족의 이야기가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고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이유는 계층 양극화가 모든 국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난이라는 소재를 웃음과 슬픔과 긴장으로 바꿔놓는 블랙 코미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넉넉히 별 5개.
대선 후 엄청난 돈이 풀리고 있다. 코로나 이후 제대로 오른 적이 없었던 코스피도 쭉쭉 오르고, 늘 오르는 것만 같던 부동산 시장은 더 빠르게 상승 중이다. 이러면 국민 모두 넉넉해질까? 당장은 그럴 것 같은 착시현상이 생기지만, 나중에 보면 빈부격차가 더 커지고 물가보다 임금 상승률이 낮은 계층의 삶은 더 곤궁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흔하면 '벼락거지'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벼랑 끝에 서서'의 모녀도 처음부터 그렇게 곤궁하진 않았다. 엄마가 받는 돈은 그대로인데 집세도 병원비도 점점 올라 더 가난해진 것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모녀가 살던 싸구려 모텔도 원래 경기 호황기에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다가 극빈층들의 거처로 전락한 곳이다. 기생충 가족도 마찬가지. 가끔 웃으며 추억할 정도로 그럭저럭 살만한 시절도 있었으나 점점 밖으로 아래로 밀려나 결국 그 지경이 되었다.
정부 주도의 경기부양으로 이뤄진 성장은 늘 끝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결과를 기대해 본다. 소년공 출신의 이재명 대통령은 가난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지자체장 시절부터 분배와 복지에 관해 자신감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주식도 오르고 집값도 오르고 환호와 기대가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지금도 벼랑 끝에서 겨우 버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주시길.
이재익 SBS라디오PD·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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