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AI 자율제조, 관건은 기술보다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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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자율제조, 미래를 열다'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며 처음 떠올린 장면은 로봇이 사람 개입 없이 스스로 제품을 만들고 설비를 제어하는 공장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마법' 같은 인공지능(AI)은 없었다. AI 자율제조의 본질은 빠르고 화려한 자동화가 아니라 느리고도 정교한 사람의 손에서 시작되는 변화였다.


울산과 여수 산업 현장에서 만난 기업들은 응용 AI 도입을 위해 수년간 '손으로 쌓아 올리는 혁신'을 이어왔다. 수기로 작성된 점검표, 엑셀로 흩어진 설비 기록, 담당자마다 방식이 달랐던 불량 판정 기준은 컴퓨터가 인식하고 학습하기엔 지나치게 비정형적이었다. AI 혁신의 출발점은 이런 엉켜 있는 데이터를 기계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다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SK이노베이션 , GS칼텍스, HD현대미포 등은 AI 붐이 일기 전 2010년대부터 정밀한 수요 정의와 현장 특화 모델을 설계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검토와 실증을 거쳤다. 자신들의 공정에서 AI가 필요한 이유를 스스로 정의하고 이를 위한 데이터 정제와 모델링부터 차근차근 밟았다. 기술을 그냥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AI가 현장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이 작업은 일종의 AI에 세상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고도의 인내심이 요구됐다.


기업들 역시 AI 자율제조 전환의 최대 장애물로 기술이 아닌 '사람들의 인식'을 꼽았다. 일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AI가 사람을 대체할 것이란 불신이 뿌리 깊었다. 반대로 일부 정부 부처나 기업 내 임원들은 AI를 마치 공정 전체에 단숨에 투입 가능한 만능 기술로 오해했다. 불신과 맹신 사이에서 책임자는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하며 나아가야 했다. 기술이 아니라 '정확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조정과 수렴의 산물이 바로 AI 자율제조였다.


정부 주도 AI 프로젝트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두루 활용 가능한 '만능 플랫폼' 구축을 목표로 한다. 다만 현장은 아직 데이터를 정제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실무자들은 포장된 결과를 만들기보다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야 할 시기라고 말한다. AI가 자율성을 발휘하기까지는 작은 혁신이 초기 모델링, 이상치 탐지, 예지보전, 품질 평가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일어나야 한다.

기술 확산 이론에 따르면 어느 시점이 되면 인식의 임계점을 넘어 기술이 폭발적으로 퍼진다고 한다. 기업의 분투, 현장의 손끝, 데이터 정제라는 지난한 축적은 그 변곡점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위기 순간마다 혁신으로 도약해온 대한민국은 AI 자율제조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다시 한번 성장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 AI는 실험이 아니라 실전이 돼야 한다. 그리고 현장의 땀이 배지 않으면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오지은 기자 j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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