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입니다. 데이터 다시 올려주세요."
공장 내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응시하던 SK이노베이션 울산CLX 공장의 박재한 기계기술팀 프로젝트매니저(PM)가 전화기 너머로 외친다. 이제 막 협력업체에서 송신한 열교환기 센서 데이터에 이상이 감지된 것이다. 인공지능(AI)이 실시간으로 비정상 패턴을 포착했고 본사 기술팀은 즉각 재측정을 지시했다. 올 하반기부터 SK이노베이션 전 공장에 도입될 AI 기반 열교환기 검사 시스템의 모습이다.
울산 지역 정유업체에서 SK이노베이션과 딥아이(DEEP AI)가 공동으로 개발한 'AI 기반 열교환기 비파괴검사 시스템'을 시연하고 있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현장에서 일차적으로 검사하고(좌), 본사 기계기술팀 사무실에서 최종적으로 열교환기 이상 여부를 판단한다(우). 딥아이
원본보기 아이콘정유·석유화학 공정의 온도를 제어하는 열 교환기 관리 고온 유체가 흐르는 만큼 미세한 마모나 균열이 생기면 유체 누출, 심하면 폭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정기 정비기간마다 한 기당 30~60회 검사를 반복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설치 규모는 SK이노베이션 울산단지에만 약 7000기, 울산 전체 석유화학 단지엔 약 3만기에 달한다. 검사 과정이 노동집약적이며 숙련자 의존도가 높아 관리의 리스크 요인으로 꼽혀왔지만 이제 전 공장에서 AI가 실시간 관리를 맡게 된 것이다.
제조공정에 AI를 도입해 가장 크게 바뀐 부분은 품질 편차의 감소다. 그간 열교환기 공정은 비파괴검사원 눈에 맡겼었다. 일일이 그래프의 형상을 확인하며 검사 한 건당 10분 이상을 집중해야 했다. 신호의 미세한 '출렁임'이 숙련자의 직감에 포착될 때 비로소 재측정이나 결함 판정이 이뤄지는 식이었다. 마치 영상의학과 의사가 컴퓨터단층촬영(CT)을 직접 판독하듯, 판단은 전적으로 숙련자 감각에 의존했다. 이는 숙련도 편차와 판독 품질 저하 문제로 이어졌다.
정유업계는 대형 사고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열교환기 비파괴검사의 정밀도를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AI를 도입했다. SK이노베이션은 핵심 인력을 모아 '스마트플랜트 추진팀'을 꾸렸고 박 PM은 기계기술팀으로 이동하기 전 이 팀에서 AI 기반 검사 기술 개발의 실무를 맡았다. 기계공학 전공에 코딩 역량까지 갖춘 그는 울산지역 스타트업 '딥아이(DEEP AI)'와 협력해 현장 수요에 맞는 AI 솔루션을 함께 만들어나갔다.
지난 11일 딥아이(DEEP AI) 직원들이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AI 기반 열교환기 비파괴검사 시스템' 품질 개선을 위해 회의하고 있다. 부산=오지은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박 PM은 "비파괴검사는 필수지만 판독 해석에 많은 시간이 들고 집중이 요구되는 작업이라 휴먼 에러가 자주 발생했다"며 "AI로 이를 보조하거나 대체하면 판독자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 도입 후 진단 정확도는 95% 이상으로 높아졌고 검사 한 건당 판독 시간은 1분 미만으로 단축되며 전체 소요 시간이 90% 이상 줄었다. 현장 검사자가 AI로 1차 판독을 하면 본사 기술팀이 이를 다시 검토하는 이중 확인 체계도 갖췄다.
SK이노베이션의 AI 기반 비파괴검사 자동 평가 시스템은 스타트업과의 협업 성과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지난 3년간 스타트업 딥아이와 공동 개발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올해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국내 최초로 신기술인증(NET)을 받기도 했다. 단순 조건만 충족하면 이상이 없다고 판단하는 '조건식 평가' 방식이 아니라 AI가 수천 개 신호 패턴을 학습하고 이를 정밀하게 분류해 결함 여부를 판단한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 기술로 평가된다. 기술 세일즈에 나선 딥아이는 현재 일본, 미국, 스페인, 싱가포르 등 7개국과 소통하고 있다.
김기수 딥아이 대표(오른쪽 첫 번째)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지난달 열린 '2025년 신기술·신제품 인증서 수여식'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과 딥아이가 공동 개발한 ‘AI 기반 열교환기 비파괴검사 시스템’은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신기술(NET) 인증을 받았다. SK이노베이션
원본보기 아이콘두 회사의 인연은 3년 전 산업전시회에서 시작됐다. 이후 업무협약(MOU), 개념검증(POC)을 거쳐 기술 고도화를 이어왔고 올해 하반기부터는 SK이노베이션 전 공장에 확대 도입된다. 딥아이는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을, SK이노베이션은 현장 실증과 데이터를 맡았다. 김기수 딥아이 대표는 "AI에 대한 관심이 낮던 시절 SK이노베이션이 끝까지 의지를 갖고 협업해 해외 기술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한국형 기술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을 잘 아는 엔지니어가 주도하고 스타트업과 유연하게 협업하는 기업 문화도 주목받는다. 울산 공장에서 만난 SK이노베이션 측 관계자는 "기술을 이해하는 엔지니어가 스타트업과 직접 손발을 맞추며 프로젝트를 이끈 점이 협업 성공의 열쇠였다"고 평가했다.
SK이노베이션 사례는 정유·화학 업계 전반의 변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GS칼텍스 역시 전남 여수공장에서 배관 외벽의 부식을 AI로 분석하는 시스템을 스타트업 '플랜트스캐닝'과 함께 운영 중이다. 기존엔 작업자가 수작업으로 수천 장의 영상 데이터를 판독해야 했지만 AI가 투입되면서 몇 초 내 결함 여부를 추출할 수 있게 됐다.
나프타 분해 등 공정 최적화에도 AI가 적용되고 있다. GS칼텍스는 AI 기반 수익 최적화 모델을 도입해 실시간 시세와 설비 조건에 따라 생산량을 자동 조정한다. 프로필렌 가격이 급등하면 관련 생산 비중을 늘리는 식이다. 최근에는 자체 개발한 머신러닝 기반 실시간 최적화 시스템(Real Time Optimizer·RTO)을 통해 고부가나프타제품(HSR) 생산량을 극대화하고 있다. GS칼텍스는 이 기술들로 지난해 산업부 'AI 자율제조 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김창헌 GS칼텍스 디지털혁신팀 책임은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AI 도입 후 약 2% 수익성 개선이 이뤄졌고, 기술을 고도화하면 효과가 더 늘어날 것"이라며 "초기엔 일부 현장 직원들 사이에서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AI가 반복 작업의 부담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것을 경험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전했다. 이어 "예전엔 디지털 전환이 일부 부서의 과제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부서를 넘나드는 협업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덧붙였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