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거의 두 달 정도를 서울에 머물며 틈나는 대로 걸으면서 언젠가 '서울은 비빔도시'라고 썼던 걸 자주 떠올렸다. 서울은 한 동네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상업과 공공시설들이 비빔밥처럼 옹기종기 잘 섞여 있는 특징이 눈에 띄어 그렇게 비유하곤 했다. 일본 생활을 접고 15년 만에 서울에 다시 살게 된 2000년대 말 무렵의 일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서울을 바라보며 나는 더 그 비유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2020년대 후반의 문턱에 서 있는 오늘날의 서울은 어떤 비유가 맞을까.
지난 20여 년 사이 가장 큰 서울의 변화 요인은 바로 계속되는 재개발이다. 한국 도시의 재개발 특징은 전면 철거 방식이다. 대상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킨 뒤 건물을 전면 철거하고 빈터에 새로운 아파트 단지를 짓는다. 이런 방식을 한국에서 개발한 것도 아니고 한국 도시만 그런 것도 아니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 주거지가 아닌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땅에서 이런 식의 재개발이 이루어진다. 주거지의 경우는 소규모 리모델링이나 재건축 중심으로 변화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대체로 한꺼번에, 순식간에 달라지기보다 천천히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뉴욕의 허드슨 야드나 도쿄의 롯폰기 힐스 같은 대규모 재개발 사례는 도시 한복판의 상업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사례다.
서울의 재개발은 거의 다 전면 철거 방식이기 때문에 한 지역이 재개발되면 있던 도로까지 없어지고 담으로 둘러싼 아파트 단지가 생긴다. 자동차와 보행자가 같이 사용하는 진입로가 없지는 않지만, 외부에서 보면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는 기존 거리와 단절돼 있다.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밖 상가는 인근 지역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니 완전히 고립돼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 있던 동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재개발은 지역 전체, 나아가 서울시 전역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재개발이 곳곳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비빔 도시에서 '피자 도시'로 변하고 있다. '피자 도시'란 무슨 뜻일까. 피자는 밀가루로 만든 도 위에 치즈를 뿌린 뒤 그 위에 페퍼로니, 햄, 피망, 버섯 등 입맛에 맞는 토핑을 올려 조리해 먹는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치즈를 바탕에 깔고 토핑에 따라 다양한 색깔이 존재한다. 동그란 모양의 페퍼로니는 대체로 큰 편이라 다른 토핑에 비해 눈에 잘 띈다. 피자 도시는 요소들이 서로 섞이는 비빔 도시와 달리 각각의 토핑들이 서로 연결돼 있지 않고 각각 고립돼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양해 보이긴 하지만 어떤 관계의 형성 없이 따로따로 고립돼 있다는 뜻이다.
피자 도시는 비빔 도시와 비교해 거시적 다양성은 비슷해 보여도 미시적 다양성은 훨씬 떨어진다. 비빔 도시는 긴 시간에 걸쳐 유기적으로 관계를 형성한 주거와 상업 지역의 다양한 관계를 느낄 수 있다. 같은 주거지 안에서 큰 집 작은 집도 있기 때문에 주민의 나이, 직업, 경제적 상황 등이 서로 다르고 이로 인한 삶의 다양성이 있다. 건물 역시 크기며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규모와 임대료에 맞게 다양한 상업 공간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는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는 곳들도 많다. 최근 들어 다양성이 도시의 가벼운 어메니티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다양성은 도시를 활기차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20세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로 꼽힌 뉴욕의 독특한 활기도 바로 이런 다양성으로부터 비롯했다.
이에 비해 다양성이 훨씬 적은 피자 도시는 당연히 활기가 떨어져 재미없는 도시가 될 가능성이 크다. 페퍼로니 공간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도시로부터 받는 자극이 적어 새롭고 창의적인 상업 공간은 자생하거나 커나가기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점차 피자 도시로 변하는 와중에 사람들은 점점 비빔 도시 성격을 간직한 지역을 찾게 되고, 그렇다 보니 성수동, 서촌, 익선동 같은 새로운 '핫플레이스'가 속속 등장한다. 최근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서울의 정체성 역시 이러한 비빔 지역이 만들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자 도시가 야기하는 문제점은 꽤 크다. 재개발을 통해 갈수록 늘어나는 페퍼로니 같은 아파트 단지에는 주류 사회 중상류층들이 모여 산다. 페퍼로니를 뺀 '치즈 동네'에는 주류가 외면하는 노인층, 학생, 외국 이주민을 포함한 저소득층들이 모여 산다. 인구로만 보면 치즈 동네에 사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이들은 대체로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상대적으로 비싼 아파트 단지에 입성을 못 해 살던 동네, 나아가 서울을 떠날 수밖에 없다. 남아 있는 치즈 동네 역시 재개발을 기다리면서 생활 환경은 계속 악화하고, 급기야는 주민들이 살기 어려운 슬럼가로 전락하고 만다. 서울에서 일하는 서민과 공부하는 대학생들은 여러 사정으로 서울에 살 수 없게 되고 먼 지역에서 서울까지 아침저녁으로 다녀야 한다.
이대로라면 서울의 미래는 명확하다. 런던이나 샌프란시스코처럼 중심부에는 부자가 살고 변두리에는 서민이 사는 '도넛 도시'로 변할 것이다. 치즈 동네는 어떻게 될까? 사람이 잘 모이는 상업 지역은 계속 핫플레이스로 남아 있겠고, 슬럼화된 지역은 공동화하면서 녹지 공원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수많은 아파트 단지 사이에 공원이 들어선다면 얼핏 좋을 것 같지만 원래 거기에 살던 서민들이 살던 곳에서 밀려나 점점 더 서울과 멀어진다면 이건 그 자체로 슬픈 이야기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한국인 대부분은 '신상' 아파트 생활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재개발 압력은 계속 거세질 것이다. 소규모 개발은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서울은 도넛 구멍 속에 치즈 동네가 적은 피자 도시로 더 빨리 변할 것이다. 활기 없고 불균형한, 이른바 재미없는 도시로 전락할 것이다. 해결책이 과연 있긴 할까. 재개발 속도를 늦추면서 치즈 동네의 소규모 개발을 지원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나아가 여러 주거 형태들이 더불어 살 수 있도록 공공임대주택을 적극적으로 마련할 필요도 있다. 논쟁을 피할 수 없겠지만 서울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이야말로 과감한 대책을 논의할 때가 아닐까.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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