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닮은꼴 두 나라가 나란히 변곡점에 섰다. 저출산과 고령화, 노동력 부족이라는 구조적 위기와 수출 중심 성장모델의 한계가 동시에 불거지며, 양국의 경제 시스템은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여기에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외부 충격까지 더해지며 이제는 개별 대응이 아닌 '공동 시장'으로의 협력 전략이 절실해졌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양국의 경제 규모를 합치면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는 만큼 협력이 가져올 효과가 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0일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일본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약 4조2100억달러, 한국은 약 1조7800억달러로, 합산하면 약 5조9900억달러에 이른다. 이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권에 해당하는 규모다. 양국 인구도 약 1억7000만명에 달한다.
김봉만 한국경제인협회 국제본부장은 "한일 양국의 인구를 합치면 유럽연합(EU)처럼 내수시장 규모가 커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도 더 큰 시장에서 팔 수 있다는 점, 바로 시장이 커진다는 것이 협력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은 내수 한계, 일본은 인력 부족이라는 구조적 제약을 안고 있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라며 "산업계 입장에선 지금이 구조적 협력을 제도적으로 설계할 최적의 시점"이라고 밝혔다.
새 정부의 일본과의 협력의지는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이 대통령은 최근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작은 차이들이 있지만 이를 넘어서 한국과 일본이 여러 면에서 서로 협력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시바 총리 역시 "60주년을 계기로 양국 간 협력과 공조가 세계를 위해 더 많은 도움이 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한일 경제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최근 들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도쿄 닛케이 포럼에서 "양국은 더 이상 경쟁국이 아니라 협력 파트너로 인식돼야 한다"며 "관세 철폐와 제도 정비를 통해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확장시키는 통합 시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수소, 액화천연가스(LNG) 공동 구매, 실버산업 연계 등은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실질 협력 분야"라고 강조했다.
양국은 저출산과 고령화, 노동력 부족이라는 공통의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일본은 전체 인구의 29.1%가 65세 이상 고령층이며 2024년 기준 고령인구는 약 3670만명에 이른다. 한국 역시 2025년에는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6%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통의 위기는 곧 공통의 해법을 가능하게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적 외형뿐 아니라 산업 구조에서도 양국은 상호 보완성이 뚜렷하다. 일본은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한국은 시스템 반도체·배터리·ICT에서 경쟁력이 있으며 글로벌 제조업 가치사슬에서 이미 두 나라 기업 간 기술 및 부품 연계가 깊게 진행돼 있다. 제도와 규범만 정비된다면 실질적인 단일시장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은 충분하다는 평가다.
양국이 이 같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려면 구조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복지·헬스케어, 디지털 기반 생산성 강화, 공동 연구개발(R&D)과 실증을 통한 기술 협력 등이 대표적이다. 메디컬 로봇, 디지털 재활기기, 고령자용 스마트기기 등은 일본의 요양시설을 실증 무대로 삼고 한국 기업이 초기 데이터를 확보해 제도권 진입을 준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모델로 거론된다.
중소기업도 공동 브랜드, 디지털 플랫폼, 물류 연계 등을 활용해 제3국 시장에 동반 진출할 경우 비용 절감과 시장 다변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이는 고율 관세, 기술 규제, 공급망 무기화 등으로 요동치는 글로벌 통상환경에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전략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이지평 한국외국어대학교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는 "앞으로의 한일 협력은 단순한 수혜나 종속이 아닌,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역할을 나누는 구조로 가야 한다"며 "단일시장 논의는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저출산과 공급망 리스크라는 공통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여권 없이 오갈 수 있을 만큼 물리적·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데서부터 협력의 기반이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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