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맞은 한국 반도체 산업을 중장기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서 일본이나 유럽연합(EU)처럼 정책금융기관을 통한 고위험 자본을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6일 한국산업은행 KDB미래전략연구소의 '주요국의 반도체산업 지원체계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의 해외 의존도가 높고, 파운드리 등 시스템반도체 역량 부족이 취약점으로 꼽힌다. 시스템반도체의 경우 세계 시장 점유율이 3.3%에 불과하고 취약한 반도체 소부장 경쟁력은 언제든 공급망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다.
연구소는 한국이 반도체 산업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학계 등 산학연이 유기적으로 연계해 중장기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데 정부의 재정정책과 병행해 정책금융기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재정과 정책금융은 위험감수전략(Risk-taking)을 기반으로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해 반도체 산업에 레버리지 효과(승수효과)를 낼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보조금·세제혜택 등이 주력인 미국의 반도체 지원방식보다는 간접금융(은행) 중심으로 금융 지원을 하는 일본이나 EU를 한국이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일본은 반도체 육성을 위해 정부 주도로 5조5000억엔(52조8000억원) 수준의 반도체 특별예산을 편성해 첨단반도체 생산설비 투자와 제조기술 개발 지원에 나섰다. 일본 정부(경제산업성)가 반도체기금 예산을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 앞에 배정하면, NEDO는 지급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반도체 기업 앞에 돈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TSMC, 키옥시아, 마이크론, 로옴, 도시바 등 첨단 반도체 기업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했다. 일본 정부는 직접적인 지원 외에도 세액공제와 정책금융기관의 장기저리 대출을 통해 정책자금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중이다.
EU의 경우 회원국 자체 재원, 정책금융기관, 반도체 프로그램 등을 통해 반도체 관련 산업 분야에 약 300억유로(46조7000억원) 수준의 자금을 공급할 계획이다. 또한 유럽반도체법에 따라 2027년까지 33억유로(5조1400억원)를 반도체 업계에 직접 지원한다. 반면 미국은 범국가 차원의 정책금융기관이 존재하지 않아 보조금, 세제혜택 등 재정 중심 지원체계를 통해 반도체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은 금융위원회와 기획재정부 등 정부 주도로 50조원 규모의 첨단전략산업기금을 한국산업은행에 조성해 반도체, 이차전지, 바이오, 인공지능, 로봇 등 미래산업을 육성할 계획을 세웠다. 다만 산은법 개정 등 국회 의결이 필요한 사안이라 구체적인 일정이나 재원 마련 등은 아직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기은 KDB미래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우리나라는 일본, EU와 같이 간접금융(은행) 중심의 금융시스템을 보유하고 있기에 재정정책과 병행해 정책금융기관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주요국과 달리 재정투입이 자유롭지 못한 우리나라의 재정적 제약을 감안할 때 일본, EU와 같이 정책금융기관을 통한 고위험·인내자본 공급은 반도체 생태계를 위한 자금 지원에 효과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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