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쌀 파동이 거세게 일고 있다. 선진국 일본에서 쌀 파동 때문에 민심이 폭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에토 다쿠 농림수산성 장관이 "우리 집에 쌀이 남아돈다"는 발언을 했다가 즉시 경질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일본 정부는 아시아권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쌀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쌀이 부족하다는 황당한 해명까지 내놓으며 비판을 받고 있다.
경질된 에토 다쿠 농림수산성 장관은 일본 미야자키현 출신으로 아버지인 에토 다카미 중의원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계에 진출한 전형적인 세습 정치인이다. 아베 정권 시절부터 농림수산성 장관을 계속 역임해온 그는 일본의 전형적인 세습 엘리트 지방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최근 일본 내 쌀 가격 폭등에 대해 올 초부터 계속 정부는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 발언을 해왔다. 일본 쌀값은 지난해 7월까지 5㎏당 2000엔 정도 하던 것이 현재는 4400엔 정도로 치솟아 짧은 기간에 2배 이상 폭등했다. 이런 심각한 상황임에도 에토 장관은 계속 정부는 비축물을 풀고 있으니 해결될 것이라며 매점매석하는 상인들이 문제라고 변명했다. 최근에는 그동안 쌀값이 너무 쌌었다는 발언까지 했다.
결정타는 본인의 지역구 지지자들이 쌀을 많이 주자 "우리 집에 쌀 많다"고 한 발언이었다. 이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고, 발등을 제대로 찍은 셈이 됐다. 이 실언으로 인해 이시바 내각의 지지율이 급락해 27%까지 떨어졌다. 조금 더 내려가면 정권이 흔들릴 수 있는 위험 수준에 근접한 것이다.
결국 더 이상 방치했다간 내각이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에 에토 장관이 경질됐고, 후임으로는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이 임명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펀쿨섹좌'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고이즈미 신지로는 정치인들 중에서 인지도도 높고 인기도 많아 사태 수습을 위해 투입된 것으로 해석된다.
20일 에토 다쿠 일본 전 농림수산성 장관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그는 일본 내 쌀가격 급등으로 민심이 악화된 상황에서 본인 집에는 쌀이 남아돈다는 실언을 해 결국 경질됐다. 로이터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현재 일본에서는 일왕의 연호까지 붙여서 '레이와 쌀 소동'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쌀값 급등으로 일본 소비자 물가지수에서 쌀 관련 품목들은 전부 지난해 대비 60% 이상 가격이 급등했다. 결국 초밥이나 삼각김밥 등 밥이 들어가는 음식들은 전부 가격이 급등한 상황이다.
쌀값이 급속도로 오르자 학교 급식에서조차 쌀밥을 주는 날을 줄이고 빵을 주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동안 한국산 쌀을 기피하던 일본인들이 대거 한국에 와서 마트에서 쌀만 사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한국 쌀이 일본 쌀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며 기피해왔다. 하지만 현재 쌀을 구할 수 없어 먹다 보니 일본 쌀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고, 가격은 3분의 1밖에 안 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다른 것은 사지 않고 쌀만 사서 트렁크에 챙겨가고 있다.
심지어 한국 쌀이 일본에 정식으로 대거 수출까지 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쌀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재해 상황에서 인도주의적 지원 정도로만 갔었고, 수출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쌀이 너무 없어 한국산이 들어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 팔리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정부는 관광객이 너무 많이 와서 쌀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해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반감으로 물타기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부가 만든 지표에 따르면 쌀 소비량이 예년 평균 2만t 정도였는데 현재는 7만t 정도로 3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한국이나 중국, 대만 등 쌀이 주식인 주변 국가에서 너무 관광객이 많이 와서 쌀이 부족해졌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 7만t이라는 것은 일본 전체 쌀 수요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일본이 한 해에 700만t 정도 쌀이 팔리는 상황에서 1% 수요로 쌀 가격이 2배 이상 폭등하고 아예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는 것이 말이 되냐는 지적이 일본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일본 정부가 만드는 괴담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지난 3월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방출된 정부 비축미의 모습. 일본 정부가 내놓은 비축미는 일본의 농협조직인 JA전농이 90% 이상 매수해 매점매석 논란이 일었다. AFP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일본 내 전문가들이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소다. 하나는 일본 정부가 장기적으로 추진해온 쌀 생산 감소 정책인 '감반정책'이고 또 하나는 우리나라 농협 같은 조직인 JA 전농에서 쌀이 나오는 대로 매점매석을 하면서 가격을 계속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감반정책은 일본 정부가 1971년부터 2018년까지 쌀 가격 안정을 목표로 농가에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심으면 보조금을 주면서 쌀 생산을 계속 줄여온 정책이다. 2018년쯤에는 오히려 쌀 수요에 비해 수급이 너무 적다고 해서 이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중앙정부와 달리 지자체들은 여전히 쌀 재배를 다른 작물로 바꾼 농가에 지원금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가 집계한 것과 달리 지방에서는 실제로 논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 결국 수급에 문제가 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JA 전농의 매점매석 문제다. JA 전농은 지금까지 쌀값이 계속 하락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시세보다 비싸게 쌀을 사서 쟁여놓는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지난 3월 일본 정부가 쌀값이 너무 올라가서 비축미를 풀었을 때, 이 중 90% 이상을 JA 전농이 다시 사들였다고 한다.
정부가 가격을 낮추기 위해 푼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그러고 나서 시중에 풀어야 하는데 안 풀고 계속 조금씩만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JA 전농은 농민들의 농가 수익을 계속 보존해야 하고, 그동안 농가 수익 보전을 위해 쌀값을 시세보다 비싸게 샀기 때문에 지금 시세보다 더 높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자신들 조직에서 발생한 손실액을 메우고자 일부러 매점매석을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런 JA 전농의 매점매석 행위에 대해 좀처럼 손을 대지 않고 있어 농림수산성과 둘이 짜고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의 쌀 시장은 우리나라와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번 일본 내 쌀 파동은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에서 쌀 파동이 과연 단기 현상으로 그칠지 아니면 앞으로 구조적으로 계속 일본의 쌀이 부족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만약 구조적으로 일본에서 쌀 생산이 계속 줄어들게 되면 당장 우리나라에는 남아도는 쌀들이 다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효과가 기대되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 상황도 계속 안심할 수만은 없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쌀 생산이 수요 대비 과잉이라는 판단이 나오고 있지만, 원래 일본도 2018년까지 감반정책이 있을 때만 해도 쌀 생산이 과잉이라는 얘기가 나왔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거의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셈인데, 일본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쌀 수요가 늘어나거나 천재지변 혹은 전쟁 등으로 인해 갑자기 공급 부족에 빠질 경우에는 대책이 없다는 게 문제다.
일본에서도 JA 전농이나 다른 도매상들이 매점매석을 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지만, 실제 예전에는 이런 매점매석이 벌어진다고 해도 크게 시장이 흔들릴 정도로 생산량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2-3개월 내로 가격이 정상화되는 일들이 반복됐다. 하지만 지금은 생산량이 워낙 수요와 맞출 정도로 간당간당하다 보니 조금만 공급에 문제가 생겨도 이런 쌀 파동이 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현재 대선의 주요 화두 중 하나가 양곡관리법 개정 문제인데, 이와 굉장히 흡사하기 때문에 일본의 쌀 파동 상황이 우리나라 정책에도 굉장히 많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는 한 해에 약 4300억원 정도를 쌀 매입 등에 쓰고 있는데, 앞으로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일본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쌀 파동을 반면교사 삼아 좋은 정책 수립에 참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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