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권도인 선생(1888~1962)이 한국인 중 처음으로 미국에서 특허를 출원한 것으로 조사됐다. 권도인 선생은 발명과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특허청은 권도인 선생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행사를 기획해 추진한다.
특허청은 올해 광복 50년 및 발명의 날 60주년을 기념해 '주요국 재외 한국인의 발명, 특허출원·등록 등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진행, 연구 결과를 15일 발표했다.
연구는 1876년 문호개방 당시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주요국의 특허등록 데이터를 조사해 한국인의 발명 기록을 발굴·분석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애국지사 권도인 선생과 그의 부인 이희경 선생. 특허청 제공
연구 과정에서 권도인 선생은 한국인 최초의 미국 특허출원자로 확인됐다. 1888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권도인 선생은 노동이민자 신분으로 1905년 하와이로 이주했다. 이후 1920년 9월 14일 미국에 '재봉틀 부속장치에 관한 특허'를 출원, 이듬해 9월 27일 특허등록을 마쳤다.
특히 첫 특허등록에 이어 특허등록을 받은 '대나무 커튼' 발명품은 하와이를 포함한 미주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어 권도인 선생이 현지에서 가구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현지에서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금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부했으며, 권도인 선생 본인도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등에서 활동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특허청은 설명했다.
권도인 선생의 아내 이희경 여사(1894~1947) 역시 하와이에서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전쟁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금해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권도인 선생 부부는 독립운동에 동참·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1998년 권도인), 건국포장(2002년 이희경)을 각각 받았다. 또 2004년 이들 부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함께 안장됐다.
특허청은 이번 연구 결과를 토대로 권도인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기획했다. 추모행사는 15일 권도인 선생 부부가 안장된 대전현충원에서 열렸다. 추모행사에는 김완기 특허청장과 장정교 대전현충원장, 권도인 선생의 후손(하와이에 거주하는 외손자) 등이 참석했다. 비문판에는 '제1호 미국 특허출원 한국인' 문구가 새겨져 생전 권도인 선생의 업적이 후대에도 계승될 수 있게 했다.
이날(15일) 정부대전청사 내 발명인의 전당에서는 독립과 발명을 주제로 기획전시실이 문을 연다. 기획전시실은 제1호 미국 특허출원 한국인 권도인 선생과 제1호 한국인 특허권자(말총모자)인 정인호 선생 그리고 강영승·박영로·장연송 선생 등 발명가 5인의 업적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마련된다. 기획전시실 개관은 독립운동과 발명 활동 두 시대정신을 동시에 실천하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꿨던 독립유공 발명가의 삶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특허청은 기대한다.
김완기 특허청장은 "발명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의 정신은 오늘날 과학기술 기반 사회에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며 "특허청은 광복 80년과 발명의 날 60주년을 앞둔 현시점에 이번 추모행사가 발명과 특허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미래의 혁신을 되새김질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특허청은 이번 연구를 통해 애국지사 강영승 선생(1888~1987)이 미국에서 특허를 등록한 발명가였던 사실도 새롭게 밝혀냈다. 강영승 선생은 1934년 2월 '식품 및 공정(Food product and process)'이라는 명칭의 특허를 출원해 1936년 5월 등록을 마친 것으로 조사됐다. 강영승 선생의 아내 강원신 여사(1887∼1977)도 애국지사로 미국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강원신)과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강영승)을 추서했다.
또 제1호 미국 특허등록 한국인은 박영로 선생(생몰 연도 미상)으로 밝혀졌다. 박영로 선생은 권도인 선생의 특허보다 이틀 늦은 1920년 9월 16일 '낚싯대(Fishing-rod)에 관한 특허'를 출원했다. 다만 등록 시점은 1921년 5월 10일로 권도인 선생의 특허등록보다 4개월여 빠른 것으로 조사됐다. 박영로 선생은 재미 독립운동단체인 '한국통신부' 서기로 활동한 기록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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