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주도권 경쟁에서 한국과 대만은 단순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협력 파트너입니다."
량광중 주한타이베이대표부 대표는 지난 9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양국이 상호 보완적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 흐름에 함께 대응할 수 있다며 이같이 짚었다. 공동 제품·기술 개발, 전략적 제휴를 통한 제3국 시장 진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일례로 그는 작년 9월 대만 수도 타이베이에서 개최된 국제 반도체 전시회인 '세미콘 타이완 2024(SEMICON Taiwan 2024)' 사례를 소개했다.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양대 반도체 기업의 수장들이 대만에서 열린 반도체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함께 맡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행사는 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대만 반도체 기업 TSMC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신호로 읽히기도 했다. 당시 SK하이닉스 AI인프라 담당 사장은 "인공지능(AI)과 반도체가 글로벌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지만, 아직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직 대만과 한국만이 막대한 자원을 투자하고 있다"면서 양국 반도체 산업의 협력을 통해 향후 기술 개발 도전에 함께 대응하자고 제안했다.
반도체 외에도 한국과 대만은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명 TV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 유튜버 '빠니보틀' 등 K콘텐츠의 힘 덕분에 한국과 대만의 정서적 거리는 어느 때보다 가깝다. 양국 교역액 역시 2024년 기준 645억달러(약 90조원)에 이른다. 실제로 대만은 한국의 다섯 번째로 큰 무역 파트너이고, 한국은 대만의 네 번째 무역 파트너다. 다만 복잡한 국제정세로 양국의 외교·안보 측면에서의 관계는 민간 교류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올해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후 미·중 긴장도 최고조에 달했다. 글로벌 패권을 두고 선진 2개국(G2)이 계속 충돌하면서 동아시아의 평화도 위협받고 있다. 량 대표는 불안정한 국제 정제 속에서 민주주의 동맹국 간 협력은 필수라는 주문도 내놨다. 그는 "대만해협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며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양국 관계는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라는 사자성어와 잘 어울릴 정도로 밀접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에 처음 부임했을 때가 2022년이다. 가장 큰 성과를 꼽자면.
△대만·한국 간 소득세 이중과세 방지 및 탈세 방지 협정이다. 이 협정은 2024년 1월부터 정식 발효됐다. 이는 대만이 체결한 35번째 소득세 협정이자, 일본에 이어 동북아시아 국가와 체결한 두 번째 소득세 협정이다. 이는 양국 간 산업 협력과 기술 교류 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한국은 대통령 탄핵 등 조기 대선을 포함한 정치적 격변을 겪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한국과 대만 간 협력 잠재력이 가장 큰 분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만과 한국은 실질적인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나라다. 경제와 무역 측면에서 보면 2024년 한, 대만 간 양자 교역액은 645억달러(약 90조원)에 달한다. 관광 분야에서도 2024년 한 해 동안 상대국을 방문한 관광객 수가 247만명에 이르렀다. 특히 대만과 한국은 모두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핵심 국가다. 일부 분야에서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지만 공급망과 기술 표준, 원자재 등에서 상호 보완적 협력이 가능하다고 본다. AI·전기차·녹색 에너지 전환 등 신흥 산업에서도 교류와 협력이 강화되길 기대하고 있다.
-대만은 지난 3월 2030년 3월17일까지 한국산 스테인리스강의 반(反)덤핑 관세를 연장했다.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이며, 양국 간 향후 무역 관계에 대한 전망이 궁금하다.
△대만 재정부와 경제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산 스테인리스강에 대한 반덤핑 관세를 철회할 경우 덤핑 행위와 자국 산업 피해가 이어지거나 재발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경제부는 기존의 반덤핑 관세를 유지하더라도 국가 전체 경제에 뚜렷한 부정적 영향은 없다고 판단해 현행 세율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향후 무역관계 전망을 보자면 대만과 한국은 정치적 상황과 경제 발전 면에서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두 나라는 경쟁과 협력을 병행하는 관계이지만 상호 보완적인 산업 구조를 바탕으로 양국 간 투자를 확대하고 산업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상생적인 무역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양국은 반도체와 기술 측면에서 더 많은 협력을 할 수 있을까.
△반도체 산업에서 대만과 한국은 다른 강점이 있다. 대만은 패키징·테스트·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설계 부문에서,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작년 대만에서 개최된 세미콘 타이완 2024는 변화의 전환점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이정배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사장과 김 사장이 직접 참석해 큰 주목을 받았고, 이는 한국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최초로 대만을 찾아 협력 의지를 밝힌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김 사장은 "한국과 대만 양국 반도체 산업이 힘을 합쳐야 기술 발전이 직면한 도전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TSMC와 삼성전자는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4를 공동 개발 중이다. 진화하는 고객 수요로 인해 복잡해진 HBM4 설계와 생산 환경 속에서 삼성전자가 고객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TSMC와의 협력을 선택한 것이다. 아울러 TSMC가 주도하는 3D 패브릭 연합(3D Fabric Alliance)에도 삼성전자가 정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양국 반도체 기업이 경쟁뿐만 아니라 실질적이고 전략적 협력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핵심 기술과 IT 인재 해외 유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만도 비슷한 문제를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관련 대책은.
△올해 3월 TSMC가 미국에 1000억달러(약 146조원)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대만의 핵심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대응해 대만 정부는 자국의 핵심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산업혁신조례' 제22조 개정안을 마련하고, 4월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해당 조항은 특정 국가나 지역에 일정 금액 이상의 해외 투자를 하려는 기업이 반도체 등 특정 산업이나 기술과 관련이 있을 경우, 사전에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인재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 발전과 탄소중립(넷제로) 전환이라는 흐름 속에서 인재의 역량과 공급이 산업 발전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도 부각되는 중이다. 이에 대만 정부는 '사람에 대한 투자'를 국가 전략 과제로 삼아 라이칭더 대만 총통이 제시한 '혁신과 번영의 국가 비전'을 실현하고, 혁신 기반의 경제 발전 모델을 가속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AI 등 IT 인재 양성과 공급 확대는 한국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대만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대만 정부는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12월 줘룽타이 행정원장은 앞으로 4년간 경제부와 국가발전위원회 등 관계 부처가 협력해 AI 등 융복합 인재 45만명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대만(TAIWAN)이라는 단어에는 'IT'도 있고, 'AI'도 포함돼 있다"며 "IT와 AI 없이는 대만을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대만 정부는 기존 통합지원 정책 외에도 올 하반기 중 법 개정을 통해 AI 관련 투자를 세액공제 대상에 포함할 계획이다. 또한 글로벌 반도체·AI 선도기업들이 대만에 연구개발(R&D) 거점을 마련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경제부는 산업 협회, 글로벌 기업, 대학교, 직업 훈련기관 등과 협력해 산업 맞춤형 AI 교육 과정을 개발하고 있다. 2028년까지 20만명의 AI 인재를 양성하고, 기업의 AI 도입을 지원해 제조업 내 AI 활용률을 5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신 한국·대만 관계의 핵심 또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국제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다. 이런 때일수록 민주주의 동맹국들의 협력이 중요하다. 대만은 전 세계 민주 국가들과 함께 '평화 공동체'를 구축해 전쟁을 효과적으로 억지하고 실질적인 힘을 바탕으로 평화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가치와 이념을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교류·협력을 늘려나갈 것이다. 이를 통해 권위주의의 도전에 함께 맞서고 세계 민주주의의 회복력과 지속 가능성을 높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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