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이 계열사 한화엔진 을 통해 중속엔진 사업 재진출을 전격 검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10여년 전 철수했던 시장에 다시 발을 들이려는 배경에는 그룹 차원의 방위산업 포트폴리오 확장 전략과 HD현대 중심으로 재편된 시장 판도에 대한 견제 심리가 동시에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한화엔진은 최근 중속엔진 시장 재진출을 위해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한화엔진의 전신인 HSD엔진 시절 확보한 중속엔진 관련 라이선스와 기술로 사업을 시작한 뒤 인수합병(M&A)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규모를 키울 것으로 보인다.
중속엔진은 선박 내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용 보조엔진(보기엔진)이나 중소형 선박(군함·해저 시추선·여객선 등)의 주엔진으로 주로 사용된다. 한화엔진은 재진출 초기 단계에서는 보기엔진 중심으로 사업을 재개하고, 중장기적으로는 군함용 엔진, 기존 선박의 리트로핏(retrofit·성능개선) 엔진 수요까지 대응하는 구조를 구상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화엔진 관계자는 "아직 사업 재개 여부가 확정된 단계는 아니다"며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방산 중심으로 그룹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있는 한화그룹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한화그룹은 2023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을 인수하면서 그룹 차원에서 조선과 방산 시너지를 강화했다. 최근에는 계열사 한화오션을 중심으로 최근 미국 군함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으며, 호주 조선사 오스탈(Austal) 인수까지 추진하면서 방산 조선 역량을 키우고 있다. 한화엔진이 중속엔진을 다시 확보할 경우 군함 건조에 필요한 엔진 수직계열화가 가능해지면서 그룹 차원의 방산 역량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현재 중속엔진 시장은 HD현대중공업이 사실상 독주하고 있는 구조다. HD현대중공업은 자체 개발한 '힘센엔진(HiMSEN)'을 통해 글로벌 중속엔진 시장에서 약 35%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선두를 지키고 있다. 특히 친환경 연료인 메탄올을 사용하는 중속엔진 부문에서는 72%의 점유율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화 의 중속엔진 재진입은 이같이 굳건한 HD현대의 시장 지배력을 정면에서 겨냥하는 도전이 될 수 있다.
다만 접근 방향은 극명히 갈린다. HD현대가 조선·엔진·기자재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뤄 기술력과 원가경쟁력을 앞세운 반면 한화는 방산과 연결된 전략통합형 포트폴리오로 맞서게 된다. 엔진 제조에서 군함 조선, 무장체계까지 한 그룹 안에서 연결되는 구조다. 이는 정부는 물론 해외 정부 조달시장, 특히 미국 국방조달(G2G) 사업에서도 강력한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결국 한화의 중속엔진 사업 복귀는 단순 조선기계 부문 확대를 넘어 '조선 기반의 글로벌 방산 그룹'이라는 청사진을 위한 핵심 퍼즐이 될 전망이다.
최근 흘러나오는 한화그룹의 STX엔진 인수설도 같은 맥락이다. STX엔진은 민수와 군수를 아우르는 육상엔진과 해상엔진 및 전자장비 기술을 갖추고 있다. 특히 국내 중속엔진 분야의 주요 플레이어로, 매각이 현실화할 경우 시장 지형에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한화그룹 입장에서는 관련 생산 인프라 및 기술 인력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상으로 꼽힌다.
STX엔진 대주주인 유암코가 보유지분을 꾸준히 매각한 것도 회사 매각의 전초작업으로 해석된다. 유암코는 올해 들어서만 지분 5.43%를 블록딜로 처분했다. 2023년 84%에 달했던 지분율이 올해 들어 60.64%(보통주 기준) 수준으로 떨어졌다. 투자금융(IB) 업계 관계자는 "국가 기간산업 성격도 가진 방산과 조선 업종 특성상 STX엔진을 인수할 만한 곳은 HD현대중공업그룹과 한화그룹 밖에 없는데, 이 중에서도 중속엔진 강화가 필요한 한화가 더 적극적일 것"이라며 "보유 지분이 상당한 유암코도 몸값이 너무 비싸지면 오히려 팔기 어려워질 수도 있기에 매각에 적극적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 차원에서도 긍정적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국내 중속엔진 시장은 현재 HD현대의 사실상 독점 체제라 공급망 편중에 따른 위험성도 지적됐기 때문이다. 한화가 이 시장에 복귀할 경우 공급망 다변화와 경쟁 구도 개선이라는 효과가 기대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HD현대 계열이 장악하고 있는 국내 엔진 시장에서 한화가 다시 한번 균형추 구실을 할 가능성이 있다"며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라 그룹 전체의 전략적 선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한화엔진은 전신 HSD엔진 시절 중속엔진 사업을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다. 당시 HSD엔진은 저속엔진 의존도를 낮추고 사업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해 2007년 선박용 중속엔진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선박용 엔진 발주량이 줄면서 급격히 위축됐다. 2011년 1402억원이었던 중속엔진 신규 수주액은 2012년 200억원대로 급감했다. 2016년 구조조정 돌입 이후 중속엔진 공장까지 매각하면서 끝내 사업을 접었다. 한화엔진은 이후 저속엔진 중심으로 사업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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