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에 설치된 헬륨루프 고온 수전해 모듈 성능 시험 장치. 한국원자력연구원은 2024년 9월 포스코홀딩스와 함께 고온가스로를 모의해 헬륨가스의 열을 이용해 고온 수전해 시설에서 수소를 생산하는 시험에 성공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원본보기 아이콘"이것이 고온가스로(HTGR)에 사용하는 트리소(TRISO) 피복 입자 시제품입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실험실에서 제작한 것이죠."
지난 17일 대전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실에서 만난 김찬수 고온원자로개발부장(박사)은 기자에게 플라스틱의 투명한 용기에 담겨 있는 검은색의 아주 작은 알갱이를 흔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트리소(TRi-Structural ISOtropic) 피복 입자는 탄화규소 세라믹으로 삼중 코팅한 직경 약 1㎜의 입자를 말한다. 4세대 원자로 중 하나인 HTGR은 이 트리소 피복 입자 핵연료를 사용한다. 탄화규소는 1600도의 고온에도 견디는 매우 안정적인 물질로 핵연료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세라믹으로 코팅한 핵연료는 재처리가 어렵기 때문에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가도 쉽게 악용하지 못한다.
국내에서 상용 운전 중인 3세대 경수로형 원자로는 감속재와 냉각재로 물을 사용한다. 반면 HTGR은 감속재로 흑연을, 냉각재로 헬륨가스를 쓴다.
헬륨은 산화 반응이 없고 중성자와 반응하지 않는 안정적인 물질이다. 누출돼도 대기권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방사선 누출 위험이 적다. 냉각재가 상실하는 사고 발생 시에도 HTGR은 흑연 노심이 붕괴열을 흡수해 사고 진행을 늦춰준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HTGR은 경수로형 원자로에 비해 안정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 김 부장은 "3세대 원자로도 충분히 안전하도록 설계됐다. 다만 HTGR은 고유의 안정적인 특성이 강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HTGR의 최대 장점은 고온의 열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수로형 원자로는 출구 온도가 300도 안팎인데 HTGR은 700~950도의 높은 열을 생산할 수 있다. 이 열을 수소 생산이나 석유화학 등 산업 공정에 사용할 수 있다. 해수 담수화나 지역난방에도 활용할 수도 있다. 현재 원자로가 '발전'이 주목적이라면 HTGR은 '열'에 특화돼 있다.
산업계는 HTGR이 철강과 석유화학 등 탄소 다배출 산업의 탄소중립 해결사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내 이산화탄소 배출의 약 15%(2022년 기준)를 차지하는 철강 산업의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수소환원제철의 도입이 필수다. 이를 위해서는 수소 생산 단가를 낮추는 것이 급선무다. 수소 1㎏에 1만원에 육박하는 현재 가격 체계에서는 수소환원제철의 경제성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HTGR을 이용할 경우 고체산화물수전해(SOEC) 공법으로 보다 저렴하게 수소를 생사할 수 있다. SOEC는 850도의 고온 수증기를 활용하는데, 고온에서는 저온보다 적은 양의 전기만으로 수소를 만들 수 있다.
석유화학은 철강과 함께 국내 양대 탄소 다배출 산업이다. 온실가스 배출의 약 10%를 차지한다. 나프타를 분해해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800도 이상의 증기가 필요하다. 현재는 석유화학 단지에서는 액화천연가스(LNG)를 연료로 사용해 고온의 증기를 만들고 있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보일러를 HTGR의 증기로 대체할 경우 석유화학단지의 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산업계는 HTGR의 가능성에 주목해 연구개발(R&D)에 뛰어들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24년 7월부터 시작한 민관합동 HTGR 개발 사업에는 주관 기관인 한국원자력연구원 외에 포스코이앤씨, 대우건설, SK에코플랜트, 롯데케미칼, 포스코인터내셔널, 동화엔텍, 스마트파워 등 7개 기업이 참여 중이다. 원자력연구원이 원자로 설계를 맡고 있으며 포스코이앤씨, 대우건설, 스마트파워가 플랜트 건설 설계에 참여한다. 동화엔텍은 원자로의 열교환기 설계를 맡을 예정이다.
SK에코플랜트는 고온 수전해를 이용한 수소 생산을, 롯데케미칼은 석유화학 공정열 활용 등 사업화 방안을 연구한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핵연료 공급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포스코이앤씨,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포스코그룹의 철강 사업과 연계한 신산업 창출 방안도 함께 연구한다. 김 부장은 "2027년까지는 설계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R&D가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2030년 초반까지는 설계 인증을 마치고 상용화 준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HTGR은 100㎿ 이하의 소형모듈원자로(SMR)로 설계될 예정이다. 소형으로 지어지기 때문에 열이나 증기가 필요한 수요지 바로 근처에 들어설 수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국내 첫 HTGR에 '헥타르(HElium Cooled Thermal Application Reactor·HECTAR)'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지 면적을 대형 원전에 비해 현저히 작은 헥타르 단위로 줄일 수 있다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
민관이 2024년 7월부터 개발하고 있는 고온가스로 '헥타르(HECTAR)' 조감도. 부지 면적을 대형 원전에 비해 현저히 작은 헥타르 단위로 설계할 계획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원본보기 아이콘한국원자력연구원은 지난해 12월 포스코홀딩스와 함께 헬륨가스를 이용해 고온 수전해 방식으로 수소가스를 생산하는 실증도 마쳤다. 고온의 헬륨가스를 이용해 700도 이상의 수증기를 만들고 이를 고온 수전해 모듈에 공급해 수소를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이 실험에서는 수소 1㎏당 36kwh 이하의 전기를 사용해 1.9N㎥(루베)의 수소를 생산했다.
해외는 우리보다 진척 속도가 빠르다. 글로벌 화학기업 다우케미컬과 X-에너지는 올해 3월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NRC)에 HTGR 건설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앞서 다우케미컬과 X-에너지는 2023년 3월 공동개발협약(JD)을 체결했다. HTGR형 SMR인 Xe-100의 개발 및 실증 사업을 함께 추진하자는 내용이었다. Xe-100은 80㎿급 원자로 4기(320㎿)로 구성된다.
실제 사업은 다우케미컬의 100% 자회사인 롱모트에너지가 맡는다. 이 회사는 텍사스주 시드리프트에 있는 다우케미컬 부지에 Xe-100 원자로를 건설할 계획이다. Xe-100에서 생산한 전기와 증기는 다우케미컬 생산 공정에 활용된다. 다우케미컬은 2020년대 후반에 착공해 2030년대 초반에 원자로 가동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국 정부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미 에너지부는 선진원자로실증프로그램(ARDP)의 일환으로 Xe-100에 초기 8000만달러를 포함해 7년간 16억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다. X-에너지는 국내 두산에너빌리티와 DL이앤씨도 지분 투자와 함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아마존도 X-에너지에 5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이미 2023년 12월 250㎿ 원자로 2기로 구성된 HTGR 'HTR-PM'의 상업 가동을 시작했다. 중국 산둥성 쉬아오완 지역에 건설된 HTR-PM은 1850가구에 지역난방을 공급하고 있다. 2012년 12월 건설에 착공했으며 2021년 8월 운영 허가를 받았다. 중국 정부를 HTR-PM을 통해 매년 3700t의 석탄을 대체하고 6700t의 이산화탄소 발생을 감축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HTR-PM 컨소시엄은 중국화농그룹(47.5%), 중국핵건설그룹(32.5%) 칭화대학교(20%)의 지분으로 구성돼 있다.
일본 원자력연구원은 2010년 HTGR 시험로인 HTTR을 건설해 수소 생산 실증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HTTR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가동을 중단했으나 2021년 재가동을 시작했다. HTTR은 일본 철강 기업 미쓰비시와 함께 천연가스·증기 개질 수소 생산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쓰비시는 이를 수소환원제철에 활용할 계획이다.
원자로에서 발생하는 열과 전기를 이용해 수소를 생산하는 기술. 원전을 활용하면 탄소 발생없이 대규모로 수소를 생산할 수 있다. 원자력 수소 생산 기술에는 원전의 전기를 이용하는 저온 수전해(알카라인, PEM 등), 원전의 전기와 열을 함께 이용하는 고온 수전해(SOEC), 원전의 초고온 열을 이용하는 열화학 방식 등이 있다. 현재 저온 수전해 방식이 상용화돼 있으며 고온 수전해 방식은 실증 단계다. 열화학적 공정은 상용화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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