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일(현지시간) 발효될 미국 상호관세의 '기준점'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2025년 나라별 무역 장벽 보고서(National Trade Estimate Report on Foreign Trade Barriers·NTE)'가 지난달 31일 공개됐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작성한 이번 보고서는 무역장벽의 정의를 좁게 설정하고 각 나라의 '주권'을 인정한 2024년과 달리 이를 광범위하게 정의했다. 한국에는 국방 절충교역 문제를 최초로 제기하며 망 사용료 문제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였다. 중국에는 자국산 우대 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며 해운·조선산업 정책 관련 맞대응도 시사했다.
앞서 USTR은 상호관세 정책 시행을 위해 지난달 미 경제단체·기관 의견 수렴을 거쳐 이번 NTE 작성 때 반영했다. 총 397페이지에 달하는 올해 보고서에서는 무역장벽의 정의가 대폭 확대됐다. 작년에는 무역장벽의 정의를 "상품 및 서비스의 국가 간 교환을 과도하게 방해하는 정부조치"로 좁게 해석했지만 올해는 "정부의 법률, 규정, 정책 또는 관행으로서 공정 경쟁을 왜곡하거나 저해하는 것으로 광범위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엔 정부 주도산업 육성정책이나 정부 보조금 기반의 상품 수출 등 비시장적 정책과 관행까지 포함했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거나 특정 품목 수출을 인위적으로 장려하는 조치, 지식재산권(IP) 보호 부족 등까지 모두 무역장벽으로 꼽았다.
보고서의 목적도 바뀌었다. 작년에는 "미국 근로자들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올해는 "미국 무역법을 집행하고 국가의 경제 및 안보 이익을 증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고 명시했다. 무역장벽 유형은 전년과 동일하게 14개를 유지했다. ▲수입 정책 ▲기술 무역 ▲위생 및 식물위생 조치 ▲정부 조달 ▲IP 보호 ▲서비스 ▲전자상거래 및 디지털 무역 ▲투자 ▲보조금 ▲반경쟁적 행위 ▲국영기업 ▲노동 ▲환경 ▲기타 등이다. 아울러 통신 관련 무역협정 운영성과도 특별 검토한다.
한국 관련 항목에서는 국방 절충교역 문제를 지적했다. 국방 절충교역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 방위 기술보다 국내 기술·제품을 우선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는 얘기다. 계약 가치가 1000만달러(약 147억원)를 초과할 경우 외국 계약자에게 절충교역 의무가 발생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절충교역은 외국에서 1000만달러 이상의 무기나 군수품, 용역 등을 살 때 반대급부로 계약 상대방으로부터 기술이전이나 부품 제작·수출, 군수지원 등을 받아내는 교역 방식을 의미한다. NTE 보고서에 한국의 절충교역 관련 언급이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고기 수입제한도 문제로 삼았다. 보고서는 또 2008년 한미 간 소고기 시장 개방 합의 때 한국이 월령 30개월 미만 소에서 나온 고기만 수입하도록 한 것을 "과도기적 조치"로 규정하며 "16년간 유지됐다"고 비판했다. 또 한국이 월령에 관계없이 육포, 소시지 등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면서 예년보다 가공 소고기 제품 수입금지 조항을 더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농업·생명공학 관련 한국의 규제 시스템도 문제로 지적했다. 미 정부는 유전체 편집 제품의 승인 절차 및 관련 정책에 대해 우려를 작년 9월24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위생 및 식물위생(SPS) 위원회 회의에서 공식 제기했다는 사실도 처음 적시했다. 다만 작년 국회에서 유전자변형생물체(LMO)법 규제 완화 초안이 마련된 점도 함께 언급했다.
디지털 무역장벽 중에선 망 사용료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였다. 현재 한국의 인터넷 서비스 공급자(ISP)의 독과점이 강화돼 반(反)경쟁적이라는 주장도 내놨다. 콘텐츠 공급자가 ISP에 망 사용료를 내도록 하는 다수의 법안이 한국 국회에 제출됐다면서 일부 한국의 ISP는 콘텐츠 공급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콘텐츠 제공업자들의 비용 납부는 한국 경쟁자를 이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이 추진하는 온라인 플랫폼 법안도 비슷한 규제 사례로 꼽았다.
미국 자동차 제조사의 한국 시장 진출 확대도 '우선순위' 과제로 꼽았다. 한국의 대기환경보전법에 따른 배출 관련 부품 규제의 투명성 문제 등에 우려를 거론했다. 제약 및 의료 기기 산업의 경우 한국의 가격 책정 및 변제 정책에 투명성이 부족하고 정부가 제안한 정책 변경에 대해 이해당사자들이 의견을 제시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업계 우려를 언급했다. 아울러 보고서는 ▲지상파 방송에 대한 외국인 출자 금지 ▲케이블·위성방송 사업자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 ▲육류 도매업 등에 대한 투자 제한 등을 거론했다. ▲한국의 화학물질 관리 관련 법률과 시행령에서 규정 집행에 대한 가이드라인 부족 ▲사업상 기밀 정보에 대한 보호 부족 등도 짚었다.
보고서는 한국 국가정보원이 보안평가제도(SES)를 통해 사이버 보안 인증 요건을 추가로 부과하고 있다는 점, 한국 공공기관이 조달하는 네트워크 장비에 국정원이 인증한 암호화 기능을 포함하도록 요구하는 점 등도 거론했다. 특히 한국인터넷진흥원의 클라우드 보안 보증 프로그램(CSAP)에 대해 "한국의 공공부문에 진출하려는 외국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에 상당한 장벽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파나마 운하 인근의 발보아항 전경. 최근 홍콩 기업 CK허치슨홀딩스가 일부 운영을 맡고 있는 파나마 운하가 미·중 갈등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AFP통신·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보고서는 48페이지나 할애해 중국 부문을 서술했다. 중국 정부에 대한 구조적·전략적 경고 메시지를 담았다는 게 특징이다. 미국과 중국이 2019년 12월 도출한 '무역 협상 1단계(Phase one) 합의'에 대한 사후 평가다. 작년에는 이행 부족을 지적하는 데 그쳤다면, 올해는 "해당 합의는 중국의 국가 주도 비시장 체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 명확하다"고 비판했다. 구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했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핵심 산업 경쟁력 확보를 목표로 2015년부터 추진한 '메이드인 차이나 2025' 정책을 대놓고 겨냥했다. 이를 가리켜 보고서는 '광범위하고 해롭다(far-reaching and harmful)'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보고서는 또 이를 두고 "중국 기업이 자국 시장을 지배한 뒤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까지 지배하는 게 궁극적 목표"라고 짚었다. 이런 중국의 정책이 다른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와 다른 회원국들에 부담을 안긴다고도 덧붙였다. 예컨대 반도체의 경우 중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보조금·국유자본 지원·수출 통제 완화 등 대규모 정책을 추진한다는 게 미 정부의 주장이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의 최전방에 놓인 해운산업에 대한 언급도 담겼다. 보고서는 "미국 조선 산업은 상업용 선박 건조 역량과 경쟁력 상실이라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이는 상당 부분 중국 조선 산업의 불공정한 관행 때문"이라고 적시했다. 보고서는 중국의 상업 선박 점유율이 1999년 5%에서 2023년 50% 이상으로 증가했다고도 밝혔다. 아울러 "피해에 대응하기 위해 1974년 무역법 301조를 포함한 무역 수단의 활용을 계속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시장에선 미 정부가 중국 선박에만 항만 입항 수수료를 인상하는 방안 등이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 대해선 비교적 완만한 톤을 유지했다. 보고서는 "미국과 일본이 미·일 무역협정(USJTA)과 미·일 디지털 무역협정(USJDTA)을 계속 이행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농업, 디지털 무역, 규제 투명성 등에서 진전이 부족하다"고 단서를 달았다.
USTR은 매년 3월31일까지 NTE를 작성해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한다. 다만 이번 보고서는 4월2일 상호관세 부과를 앞두고 발표돼 의미가 남다르다. 올해 보고서에 담긴 지적사항이 각국의 상호관세 부과 여부와 부과 시 세율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시장에선 예상됐다.
한편, NTE 보고서 발표 이후 미국 경제단체는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는 디지털 무역 장벽에 찬성하며 USTR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반면 국제유제품협회(IDFA)는 중국 선박에 항만 입항 수수료를 최대 100만달러까지 올려받는 등 사실상 중국 선박에 대한 제재가 미국 유제품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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