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8천만원 너희가 갚아라"… '날벼락 청구서'에 몸사리는 공무원들[신속집행의 덫]①

신속집행 기조 맞춰서 돈 줬는데
2억8000만원 받고 파산한 기업
국가는 담당자들에게 "변상하라"
'징계 받을라'…보험 드는 지자체

지역에서 회계나 계약 업무를 진행하는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얘기가 있다. 2010년 충북 음성군에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국가로부터 억원대에 달하는 돈을 추징당한 일이다. 사고의 시작은 신속집행이었다. 당시 정부는 지자체 공무원들에게 하반기 예산을 상반기에 당겨 집행하라고 지시했다. 부진한 경기를 빨리 살려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민간에 사업을 맡기고 나랏돈을 지급하는 부서도 예외는 없었다. 원래라면 사업자와 실행능력 여부를 따진 뒤에 선금을 줘야 했지만 심사 기간이 짧아지면서 검토가 소홀해졌다. 공정 단계에 맞춰 돈을 지급한다는 원칙도 사라졌다. 신속집행 기조에 맞춰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약속한 대금을 대부분 지급하는 관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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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고가 터졌다. 도로 명판과 건물 번호판을 설치하기로 한 사업자가 나랏돈 2억8000만원을 챙긴 뒤 파산했다.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돈을 줘버린 게 화근이었다. 현장 확인 과정도 생략됐다. 발생한 손해를 메우는 건 공무원들의 몫이었다. 결재서류에 사인했던 담당자 4명에게 횡령한 돈을 갚으라는 청구서가 날아왔다.


이 사태를 몸소 지켜봤던 공무원 A씨는 아시아경제 측에 "신속집행으로 공무원이 구상권을 청구당했다는 사실이 파다하게 퍼졌다"면서 "지방직 공무원들이 신속집행에 몸을 사리기 시작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고 회상했다. 정부 기조에 따랐던 만큼 개인 신상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구상권을 청구 당했으니 어떤 공무원이 신속집행에 적극 나서겠냐는 게 A씨의 토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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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못 믿겠다…보험 들기 시작한 공무원들

이후 여러 지자체에서 비슷한 사례가 속출했다. 강원도의 한 지자체에서는 2012년 도로 확·포장 공사를 위해 한 건설사와 4억1600만원의 공사도급을 체결했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선급금으로 2억9100만원을 지급했는데, 1년 뒤 건설사가 공사 포기각서를 제출하고 폐업했다. 2021년에는 전북의 한 지자체에서 신속집행에 쫓긴 공무원들이 사업자의 위조서류를 적발하지 못하고 선급금을 지급해버리는 일이 생겼다. 책임 공무원 2명은 각각 1억6000만원을 변상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자 대다수 지자체가 '이행보증보험'이라는 새 제도를 도입했다. 이행보증보험은 사업이 이행되지 못했을 때 보증 계약에 따라 불이행의 손실을 보증하는 상품이다. 공사를 하는 사업자가 정부 자금을 받고 공사 이행을 하지 못하면 보증을 선 업체가 대신 돈을 갚는다. 공무원들은 보험에 가입했다는 서류를 제출해야만 지자체 사업자로 선정한다는 규정을 마련했다. 신속집행으로 인한 징계를 피하기 위해 불필요한 행정절차가 추가된 셈이다.


지역 공무원들은 이행보증보험을 무리한 신속집행의 부작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사업자는 보험에 필요한 추가 비용을 부담하고, 공무원들은 보험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행정력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지자체에서 계약 업무를 담당하는 B씨는 "이행보증보험 수수료가 비싸다 보니 사업자들이 항의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보험에 가입하기 싫으니 돈을 천천히 달라는 요구도 들어와 난감하다"고 털어놨다.


공무원 노조 측은 전례 행사처럼 반복되어 온 신속집행의 부작용을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국공무원노조 관계자는 "3월 영업일이 시작되면 지자체에서는 신속집행 1분기 목표율을 채우기 위해 비상이 걸린다"면서 "사업자들이 원치 않는 돈을 억지로 쥐여주는 일까지 빈번하게 생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에서 무리한 신속집행을 지양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세종=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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