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피해 갔는데, 노조 리스크도 없다"…제3시장 찾는 기업들[통상이론 붕괴, 新공급망 시대]⑥

미국도 마냥 안전하지 않다, 부담 커진 기업들
인도·동유럽·동남아…신흥시장 공급망 다변화
이태규 "구조적 흐름 읽고…이동은 신중하게"

편집자주'트럼프 행정부'가 촉발한 관세 전쟁이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고 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후 낮은 관세를 기반으로 30년간 지속돼온 세계화(Globalization)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신 코로나19 사태 이후 부상한 현지화(Localization)가 대세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과거엔 '최적의 비용'이 공급망 구축 1순위였다면 이젠 공급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게 기업들의 최우선 순위가 됐다. 특히 두 차례의 트럼프 집권기를 거치면서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생산기지가 자리 잡는 흐름이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통상 정책에 따라 생산 전략을 뜯어고쳐야 할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할지 기로에 섰다. 아시아경제는 글로벌 공급망의 지각변동 속 우리 기업들의 대응 방안을 6차례에 걸쳐 심층 분석한다.

인도 남부 안드라프라데시주에 위치한 스리시티(Sri City). '관세를 피해 갔는데, 노조 리스크도 없다'는 이곳은 LG전자가 새로운 생산단지로 점찍은 지역이다. 인도에서 신규 생산라인을 세우는 것은 2006년 푸네 공장 준공 이후 약 20년 만이다. 연내 착공해 내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인 가전제품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리시티는 물류 인프라가 우수하고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가 제공되는 경제 특구로, 글로벌 제조업체들의 투자처로 주목받고 있다. LG전자는 스리시티 공장에서 주력 가전제품을 생산하고, 인도 및 주변 아시아 시장으로의 공급망을 확대할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LG전자의 스리시티 공장 건립은 인도 내수 시장 공략뿐만 아니라 글로벌 수출 기지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며 "세제 혜택과 우호적인 노동 환경을 적극 활용해 인도 시장에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 기업들은 관세 부담과 무역 장벽이 심화하면서 한국을 떠나 비용 효율성을 유지할 최적의 생산지를 찾아 나섰다. 미국의 통상정책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무역 흑자국, 유럽, 동남아시아, 남미 등 다양한 지역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각국은 제조업 기반, 인재풀, 정책 지원 등을 앞세워 기업 유치에 나서고 있으며, 기업들은 생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공급망 다변화와 자동화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변화하는 무역 환경에 적응하면서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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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무역 흑자국'을 찾아라."

업계에서는 미국의 무역 흑자국을 생산기지로 주목하고 있다. 싱가포르를 포함해 네덜란드, 홍콩, 브라질, 호주, 영국 등이 미국의 무역 흑자국이다. 대기업 한 고위관계자는 "미국이 무역흑자가 되는 국가가 좋은데 우리가 들어가면 그 나라 수출이 증대돼 또 관세 얘기가 나올 테니 안전지대는 없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협력사까지 전부 무인화, 로봇화,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해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대체 불가 기술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기지를 옮긴다고 해도 원자재 조달, 물류비용, 인력 수급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 미국과의 무역 마찰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기업들은 단순히 생산라인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공급망 다변화와 자동화 기술 도입에도 집중하는 모습이다.

수요 찾아 생산기지 구축, 유럽 부상

폴란드·체코처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주요 무역 허브 국가도 주목받고 있다. 이곳은 제조업 기반이 갖춰져 있으면서 이공계 인재 수준도 높다. 이미 미국의 IT 기업 구글은 바르샤바에 사무소를 개설했고, IBM도 사무소를 두고 있다. 독일의 가전제품 제조기업 밀레, 완성차 제조사인 메르세데스 벤츠도 폴란드에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이들 국가에서 외국 기업에 대한 유인책을 펼치고 있다는 점도 기업들의 구미를 당기는 요인이다.

폴란드·헝가리 등은 법인세 감면 혜택, 인프라 지원 등을 제시하면서 전기차 배터리와 자동차, 전자제품 등 고부가가치 산업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유럽은 최근 배터리 공급지로 부상하고 있다. 배터리 분야 국내 기업들은 이 시장을 타깃으로 공급망 설계를 준비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6년 양산을 목표로 앙카라 인근 바슈켄트 지역에 최대 45GWh 규모로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SDI도 2023년 BMW와 협력해 헝가리에 전기차 배터리 합작 공장 건설을 검토했다. 신원규 한국경제인협회 초빙연구위원은 "미국의 대중 관세 부과가 중국의 보복전으로 격화되면 유럽연합(EU)은 미국·중국과의 교역을 줄이고 한국과의 교역을 상대적으로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며 미·중 패권 경쟁이 한·EU 간 교역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동남아는 값싼 인건비? "이젠 인센티브 국가"

동남아도 공급망 대체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과거에는 값싼 노동력을 찾아 동남아에 진출했다면 이젠 정부 차원의 공격적인 산업 육성 정책을 바탕으로 한 매력적인 시장이다. 인도네시아·베트남·필리핀 등은 약 5억명의 인구를 가진 '빅(BIG) 3' 시장으로 꼽힌다. 단기적으로는 반도체·자동차·철강·전기차 등 산업이 탄력을 받고, 중장기적으로는 일반기계·석유화학·석유제품 등이 유망하다.

LS전선은 베트남을 중심으로 동남아 전력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정부의 인센티브와 탄탄한 내수시장, 나아가 수출 기지로서도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 LS전선은 풍력 발전 등 신재생 에너지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배터리 업계에서도 관세전쟁으로 국가 간 무역 장벽이 '블록화' 양상을 보인다면 향후 동남아·남미 등 신흥 시장으로 공장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단기적으로는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공급망 또는 사업 전략 등을 수립할 수밖에 없지만, 관세전쟁과 같은 불안정성이 지속된다면 공급망 다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업계 관계자는 "동남아·남미 등은 전기차 보급률이 낮아 아직 판매량이 높진 않다"면서도 "이는 '성장성이 높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으로, 네트워킹 확장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싱가포르도 유력한 생산기지 후보로 꼽았다. 그는 "아직 구체적인 사례는 나오지 않았지만, 싱가포르도 지금의 (무역 갈등) 상황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며 "중국에 투자했다가 대체지를 찾는 기업들이 싱가포르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싱가포르 정부도 기업 유치를 위해 적극적인 물밑 작업에 나섰다고 전했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제3시장 진출에 대해 기업들의 신중한 전략 수립을 요구했다. 이 위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4년 뒤에 정부가 또 바뀔 것"이라며 "새로운 공급망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려면 일단은 트럼프의 정책에 적응하면서 향후 전반적인 글로벌 경제 흐름이 어떻게 변하는지 구조적인 변화를 읽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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