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조각 세계에 사는 아들, 나무가 된 엄마 이야기

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조현병 진단을 받은 아들의 엄마가 지난 18년의 세월을 기록한 에세이다. “삶 밖으로 튕겨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중심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저항의 시간”으로 묘사되는 투병 기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질환과 치료법에 관한 정보가 부족해 불안했던 시기를 거쳐 보호병동 생활부터 퇴원 후 서른 살 청년이 되기까지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한다. 질환·돌봄·자립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정실질환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현실적인 고민과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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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나쁜 사람들이 아파트 상가 앞에 모여 있다고 했다. 자신을 위협한다고, 자꾸 나오라 한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엄마 아빠를 해칠 거라고 했다. 뛰어나갔다. 상가에 가보았다.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돌았다. 어디에도 아이를, 우리 가족을 위협할 만한 나쁜 사람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우리에게 닥친 이 상황은 도대체 무엇인가? 정신 차려야 한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18쪽>

아이의 소아정신병동 생활은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입퇴원을 12회 반복하며 계속되었다. 나무에게 맞는 치료제를 찾는 데 꼬박 3년 6개월이 걸렸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매일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경기도 파주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했다. (중략) 의료진과 의논한 결과 병원에서 학교로 통학하기로 했다. 의료진은 알고 있었다, 이 병이 오래갈 것을. 그리고 특히 소아 환자에게는 학교 졸업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무는 병실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1시간 30분을 달려가 1시간 수업을 받고, 조퇴해 다시 병원에 돌아왔다. 그렇게 아이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31~32쪽>

나는 이 청년의 불안을 알지 못한다. 세상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그것을 짐작조차 못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말해야 한다. 이런 증상으로 힘든 사람도 있다고, 이 불안에 사로잡히는 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겉보기에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이런 증상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때가 있다고. (중략) 이 불안 안에서도 이 사람은 생을 꾸리고 자신을 돌보면서 살아간다. <51쪽>

망상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환자에게 이 소리는 진짜다. ‘나와, 나와.’ 엄마 아빠를 해치려는 나쁜 사람들이 나오라고 계속 소리친다. 나무는 아직도 가끔씩 이 소리가 진짜인지 묻는다. “엄마 괴롭히는 사람들 없죠?” 나는 아니라고, 그 누구도 엄마 아빠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니라고 해도 환청이 들리자 불안이 뒤따라오는 모양이다. 나무는 거실을 오간다. 왔다 갔다를 무한 반복한다. 길면 7시간, 짧으면 2시간 동안 왔다 갔다 한다. 밤이 온다. 밥이 식는다. 그렇게 하루가 간다. <54쪽>

조현병 치료에는 완치도, 정답도 없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환자를 지지하고, 치료에 대한 반응을 관찰하면서, 환자의 일상이 유지되도록 지원해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인삼각 경기를 뛰는 것이 조현병 치료다. <64쪽>

물리적으로 환자를 돌볼 사람이 가족밖에 없다면, 가족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사적 구조에만 기대는 돌봄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마을이, 사회가 조현병 환자의 돌봄을 나누지 않는다면 뉴스에서 접할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이 만연해지는 현실이 될 것이다. 가족이 환자를 ‘독박 돌봄’하라는 요구는 버티다가 쓰러지라는 말과 다름없다. 그리고 이 아이는 나만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아이니까, 사회 구성원으로서 돌봄을 나눌 공동체가 필요하다. <76쪽>

장애인 등록은 나무가 덜 외롭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됐다. 이렇게 나무는 자존하고 자립하기 위한 길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병도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도 있고, 그 삶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말이다. <127쪽>

나무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모색했다. 병을 가지고,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면서도 살아가는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학 졸업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하겠지만, 나무에게 그 6년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2023년 2월, 아름다운 겨울 캠퍼스에서 나무는 사각모를 푸른 하늘 위로 날리며 졸업을 했다. 누구보다 애쓴 나무를 위해 우리는 교정이 떠나가게 손뼉을 쳤다. <134쪽>

퍼펙트 데이즈를 쌓아가는 것이 수행이자 치료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주 보통의 완벽한 날들을 위해 아이는 매일 무엇인가를 하고, 그렇게 우리는 나무가 된다. 잠시 피고 지는 꽃이 아니라 오래오래 그 자리에 있는 나무가 된다. <176쪽>

내 아이는 조각난 세계를 삽니다 | 윤서 지음 | 한겨레출판사 | 200쪽 | 1만7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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