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둬들인 SK하이닉스가 오는 3월로 예정된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를 위한 최종 자금납입을 무난히 완료할 것으로 보인다. 향후 SK하이닉스는 인텔의 낸드 사업 관련 IP(지식재산권)와 중국 다롄 공장 운영 인력 등을 넘겨받게 된다.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시설뿐 아니라 기술·인력까지 흡수한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트럼프 2기 대중국 경제 조치 강화와 어려워진 낸드 업황 등을 감안하면 긍정적 기대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3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2021년 70억 달러 지불로 1차 자금납입을 완료한 데 이어 오는 3월 남은 20억 달러의 잔금을 납입하며 인텔의 낸드플래시·SSD(솔리드스테이드드라이브) 사업 인수·합병(M&A)을 마무리 짓는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이번에 딜 클로징을 하면 다롄 공장 운영 권한이 완전히 넘어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는 낸드 사업의 약세를 인텔 인수로 단숨에 극복했다. 그전까지 낸드플래시 사업은 SK하이닉스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하이닉스는 D램에서는 삼성전자에 이어 꾸준히 2위 사업자 자리를 유지해 왔지만, 낸드 사업에서는 5위 사업자에 머물렀다. 하지만 현재는 D램 2위, 낸드 2위 사업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삼성전자와 함께 확실한 메모리반도체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최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중국 견제가 시작되면서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인수에 대한 부정적 전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 대한 고율 관세를 공언해온 만큼 사업 리스크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다. 중국 기업들의 빠른 성장으로 한국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낮아질 거란 전망도 나온다.
유회준 반도체공학회장(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부 교수)은 SK하이닉스의 인텔 인수에 대해 "트럼프 정부의 '자국 우선주의'의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보면 중국과의 관계가 풀렸을 때 좋은 지렛대가 될 수도 있지만, 현재로선 '고물'을 받는 느낌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중국 공장의 낸드플래시 성장성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전망했다. 낸드플래시 업황 자체는 AI 붐에 따른 데이터센터 확충 등 당분간 수요가 확대될 거란 게 중론이지만, 중국 사업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창한 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하이닉스가 단기적으로는 전체적인 물량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메모리 사업만 갖고 중국에서 하이엔드 제품군을 구성하긴 어렵다"며 "기존 물량을 생산하는 보완 투자만 가능할 뿐 첨단 기술 신규 투자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짚었다.
삼성전자에서 30년 넘게 재직한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 대학 석좌교수는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이 중국에서 생산하는 낸드 플래시 등이 현지에서 어느 정도 소비된다고 해도, 결국 미국으로의 수출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며 "나름의 판단이 있겠지만 트럼프의 중국 괴롭히기가 계속되면 공정 업그레이드를 위한 장비 반입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촉발한 불확실성에 더해 장기적 관점에선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성장을 변수로 분석했다. 그는 "중국 기업들이 점차 메모리 생산능력(CAPA)을 늘려갈수록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자 할 것"이라며 "당장은 트럼프와의 협상이 중요하고, 장기적으로 보면 중국에서 서서히 빠져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낸드 업황 전망도 밝지만은 않다. 올해 전 세계 주요 반도체 업체들이 낸드 플래시의 감산에 돌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낸드 플래시 업계는 수요 약세와 공급 과잉으로 인한 이중 압박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렌드포스는 "이에 대응해 미국 마이크론, 삼성전자, SK하이닉스(솔리다임 포함), 키옥시아, 샌디스크 등 제조업체들이 감산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주로 가동률을 낮추고 공정 업그레이드를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감산을 시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낸드 제조업체들이 감산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시황이 지속 악화하고 있어서다. 대내외 불확실성 확대로 스마트폰, 노트북과 같은 핵심 소비자 가전제품 출하량이 계속해서 부진한 데다, 그나마 견조했던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도 IT 투자 둔화로 성장세가 꺾이고 있다는 전망이다.
낸드 가격도 지속 하락 중이다. 작년 3분기부터 낸드 가격은 하락세를 보이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 수요 역시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 메모리 업체들의 공세도 이유로 꼽힌다. 트렌드포스는 "중국 공급업체들은 자국 대체 정책에 힘입어 공격적으로 생산량을 확대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글로벌 시장 경쟁이 심화하고 있다"고 했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이미 마이크론은 낸드 감산 계획을 발표했고, 키옥시아와 파트너사인 샌디스크도 비슷한 조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삼성전자는 중국 시장에서의 경쟁 심화와 새로운 기술로의 지속적인 전환으로 인해 재고 압박이 가중되고 있고, SK하이닉스도 생산 전략 조정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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