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우리나라에서 국내 반도체 엔지니어들을 대상으로 채용 면접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론이 국내를 찾아 채용을 진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업계에선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경쟁 관계인 마이크론 행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인재 유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평가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최근 몇 주간 경기도 판교 일대 호텔 등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포함한 국내 반도체 엔지니어들을 대상으로 면접을 진행했다. 지원자들은 마이크론에서 온 대만 출신 매니저와 1대1로 대면 면접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면접은 영어, 프레젠테이션(PT) 등으로 30분가량 진행했다.
이번 면접은 마이크론이 대만 타이중 지역에 짓는 팹(공장)에서 일할 인력을 뽑기 위해 이뤄진 것으로 풀이된다. 면접에 참여한 개발자 전언에 따르면 대만뿐만 아니라 마이크론 본사가 있는 미국, 팹이 있는 싱가포르 근무를 제안받은 이들도 있다고 한다. 마이크론 행보가 눈길을 끄는 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우리 기업들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시장 선점을 놓고 격렬히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엔 채용담당자가 우리나라를 직접 방문해 인재 채용에 나섰다는 점에서 그 이전과 차이가 있다.
국내 업계는 중국 업체보다 마이크론이 우리 엔지니어들을 데리고 가려 할 때 더 긴장한다고 한다. 마이크론이 이직을 고려하는 우리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호감도가 가장 높은 반도체기업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론 본사는 미국 아이다호 보이시에 있고 미국 전역에 많은 지사를 두고 있다. 우리 엔지니어들로선 마이크론 이직을 통해 가족들에게 미국 생활을 누릴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끌린다고 한다. 마이크론은 높은 비율의 급여 인상과 주거비 지원 등 복지 혜택까지 약속하며 엔지니어들을 사로잡고 있다. 최근 경력직 모집에서 마이크론은 지원자들에게 원천징수 기준 10~20% 임금 인상, 거주비 및 비자 프로세스 지원 등을 오퍼 조건으로 내건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론은 우리 기업들에 익숙한 HBM 제품에 생산력을 쏟고 있고 대부분의 공정 기술이 우리 것과 많이 닮았다. 이 때문에 엔지니어들이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우리 반도체 기술의 시초는 마이크론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고(故) 이병철 회장의 주도로 삼성이 처음으로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려 한 1970~80년대 당시 마이크론의 기술을 많이 참고했다는 것이다. 다만 실제 마이크론 기술을 가져와 쓰지는 않았다. 당시 삼성이 결성한 ‘64K D램 개발팀’이 마이크론에 돈을 주고 반도체 기술이 담긴 설계도면 제공, 개발팀 연수를 약속받았지만, 마이크론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서로 갈라섰다. 이후 삼성은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나서 1983년 64K D램을 개발해냈다. 이때부터 D램 기술에서 삼성전자 등 우리 기업들이 마이크론에 크게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이크론이 우리 엔지니어들에 눈독 들이는 배경에는 HBM 시장에서 경쟁력을 회복하겠단 야심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마이크론은 우리 기업들이 D램 기술에서 많이 앞서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 우리 엔지니어들을 대거 영입해 D램을 높이 쌓는 HBM 기술력에 힘을 싣겠단 구상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크론은 2026년부터 6세대 HBM인 HBM4를 대량 생산하기로 청사진을 세우고 사활을 걸고 있다. HBM 시장에서 만년 3인자에 머물고 있는 데다 최근 발표한 2025년 1분기 실적에서 시장이 기대했던 수준에 크게 못 미쳐 발등에 불도 떨어졌다. 해당 분기에 마이크론은 87억1000만달러(약 12조6251억원), 주당순이익 1.79달러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월가가 전망한 매출 89억9000만달러(약 13조310억원), 주당순이익 1.92달러에 크게 못 미쳤다. 문제는 다음 분기에도 이 저조했던 실적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마이크론이 4세대 제품인 HBM3 양산을 건너뛰고 HBM3E에 발을 들인 만큼, 후속 제품 개발과 공급 물량 확대 등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더 많은 역량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우리 엔지니어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려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인 것으로 풀이된다.
인재 영입에 나선 마이크론의 행보를 계기로 당분간 기업 간의 인재 쟁탈전이 뜨거워질 가능성이 엿보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우리 기업들도 국내 인재를 지키고 해외의 좋은 인재들을 불러들일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성과급 등을 통해 인재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나선 분위기다. 삼성전자는 지난 20일 사내망을 통해 메모리사업부에 기본급의 200%를 하반기 성과급으로 지급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SK하이닉스는 곽노정 대표이사 사장이 최근 경기도 이천캠퍼스에서 열린 직원들과의 소통행사에서 "설 전인 내년 1월 내 초과 이익성과급(PS)을 지급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PS는 연간 실적에 따라 1년에 한 번 연봉의 최대 50%(기본급 1000%)까지 지급하는 인센티브다. 업계에선 SK하이닉스가 올해 최대 실적을 기록했을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이번에 SK하이닉스 직원들이 받을 PS도 역대 최대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