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고(故) 김현식씨가 3D 홀로그램으로 무대에 서고 고 신해철씨의 음성이 담긴 광고가 방송을 탄다. 직접 만날 수 없는 버추얼 아이돌이 인기를 끄는 세상이다. 인공지능(AI) 기술로 인물의 형상이나 특징을 복원하거나 새롭게 개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허락 없이 버추얼 아이돌의 얼굴을 도용하고 고인의 목소리로 상업적 이익을 꾀한다면, 또는 누군가 유튜버의 얼굴을 합성해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될까. 소위 ‘초상사용권’으로 불리는 ‘퍼블리시티권’이 위협받고 있다. AI 시대에는 퍼블리시티권 논의가 더욱 심층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퍼블리시티권은 ‘재산권으로서의 초상권’을 말한다. 이름이나 얼굴, 목소리 등 특징적인 요소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권리다. 연예인 등의 명성을 이용해 허락 없이 상업적 이용을 시도한 사건들이 증가하면서 퍼블리시티권이란 개념이 탄생했다. 향후 ICT 발달과 온라인 플랫폼 확대로 누구나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 일반인도 퍼블리시티권의 분쟁 대상이 될 수 있다. 진정화 한국지식재산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최근에는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기술의 발달과 사회 변화로 보호받아야 할 영역이 새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퍼블리시티권을 확보하기 위해선 법적 장치가 필수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최근 발간한 ‘개인정보 이슈 심층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판례를 통해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현재 35개 주에서 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유명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퍼블리시티권을 보호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는 퍼블리시티권의 사후 보장기간을 70년, 오클라호마주는 100년으로 정하기도 했다.
진 부연구위원은 "퍼블리시티권은 애초에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미국에서 발전한 법리"라며 "한국과 일본에선 아직 법적 보장이 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어느 법에서 퍼블리시티권을 명시할지 등에 대한 논의가 성숙해질 필요가 있고, 이해관계자의 의견수렴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퍼블리시티권을 보장하도록 만들려는 시도가 국내에서 없었던 건 아니다. 19대 국회에서 ‘인격표지권 보호 및 이용에 관한 법률안’을 제정하려고 했지만 임기 만료 폐기됐으며 2022년엔 법무부가 민법에 ‘인격표지영리권’을 신설하는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여기에는 모든 개인들의 보편적인 권리로서 인격표지영리권을 명문화하고 상속여부 등을 명확히 규정해 분쟁을 예방하고자 했다. 하지만 해당 민법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되지 않으면서 퍼블리시티권을 둘러싼 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9월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인격권 침해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민법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상태다. 가짜뉴스나 디지털 성범죄 등과 같은 인격권 침해 문제가 날로 증가하는 만큼 이에 대응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확실하게 두기 위함이다. 하지만 퍼블리시티권의 양도성과 상속성 인정 여부, 보호기간은 명문화하지 않았다. 현재 부정경쟁방지법상에 인적 식별표지 무단사용행위를 규정하긴 했지만 행위에 대한 규제이지 권리를 부여했다고 보긴 어렵다.
퍼블리시티권이 아직 법제화되지 않은 건 해소되지 않는 쟁점 때문이다. 퍼블리시티권을 양도·이전·상속이 가능한 재산권으로 봐야 할지, 양도나 이전이 불가능한 인격권으로 봐야 할지 의견이 갈린다. 또 보호기간을 몇 년으로 할지, 유명인에 한정할 것인지, 일반인에 대해서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뉜다.
지난 3월 방송인 송은이, 김미경 등 유명인을 사칭한 피싱 범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당사자들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플랫폼사에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는데, 사건을 맡은 법무법인 대건 한상준 변호사는 유명인 사칭 피싱 범죄로 인한 피해금액이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이에 네이버는 사칭피해 신고란을 구축했고, 구글은 사칭 등 허위 정보를 제공해 사용자를 속인 광고주의 경우 즉각 해당 광고 계정을 정지시키는 등의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 역시 플랫폼의 자율 규제이자 사후 대책에 해당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보긴 힘들다.
또 사망한 유명인은 개인정보보호법상 보호 대상이 될 수 없고 버추얼 휴먼의 경우에도 인격권이 존재하지 않아 기존 법으로 도용 등의 행위를 보호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권일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교수는 "AI가 가수를 모방해 생성한 음악의 경우 퍼블리시티권 침해가 될 수 있다"며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도 퍼블리시티권을 주장하거나 보호를 요청하는 사례가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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