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들이 추진 중인 국가 차원의 데이터센터 도입에 기여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주요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들이 동남아 국가에 인공지능(AI) 데이터 센터 설립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전략적 파트너로 격상된 아세안 국가들과 과학 및 기술 지원을 통한 연대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과 아세안 국가들의 초고성능 컴퓨팅(HPC) 협력 사업이다. 2일 KISTI에 따르면 지난 9월부터 한-아세안 디지털 혁신 플래그십(KADIF)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GPU 기반의 3.5테라플롭스급 성능의 HPC 클러스터와 3페타바이트급 스토리지를 구축하고 4년간 160명의 HPC 전문가를 양성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핵심은 가칭 ‘아세안 HPC 센터’ 개소다. 센터는 내년 10월 중 인도네시아에서 개소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아세안 국가들은 더욱 복잡한 데이터 분석과 GPU를 활용한 고성능 AI 모델 학습, NPU를 활용한 AI 추론 등을 수행하며 역내 과학기술 발전을 가속하는 효과가 기대된다.
이 프로젝트는 외교부가 아세안 국가들에 출자하는 아세안 협력기금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한국이 아세안에 공여한 기금을 우리나라 출연연이 확보해 아세안의 디지털 인프라를 개선하는 형식이다. 이를 위해 과기정통부, 외교부, 주 아세안 대표부, KISTI가 아세안 사무국과 함께 협력하고 있다.
지난 5월 이종호 당시 과기정통부 장관은 까으 끔 후은 아세안 사무총장을 만나 지난해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제안된 ‘디지털 혁신 플래그십 프로젝트’ 성공적 착수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정상 차원에서 내려진 합의인 만큼 적극적인 추진은 필수다.
KISTI는 인도네시아 재난관리청(BNPB)과도 슈퍼컴퓨터 인프라 구축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다. 2023년부터 2026년까지 총 4년간 사업 예산 33억원을 투입해 인도네시아의 슈퍼컴퓨터 인프라와 데이터 기반 재난안전대응 솔루션 구축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김승해 KISTI 아세안협력사업애자일팀장은 "이들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술 지원을 넘어 한국이 아세안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이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한 아세안 시장에서 한국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전략적 기회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10월 윤석열 대통령이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해 아세안과의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만큼 과학기술 분야의 협력 중요성도 더욱 커졌다.
◇KISTI, 아세안 HPC 데이터센터 구축= 현재 아세안 지역의 HPC 인프라는 태국과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매우 취약한 상황이다. 톱500에 등재된 슈퍼컴퓨터도 단 4대에 불과하다. 김 팀장은 "아세안 국가들의 HPC 인프라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어 선진국과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며 "한국의 슈퍼컴퓨팅 기술과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아세안의 디지털 격차 해소에 기여하고 한국의 기술이 진출하는 효과도 노릴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하드웨어 구축을 넘어 소프트웨어와 인력 양성까지 포괄한다. KISTI는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 플랫폼을 아세안에 보급하고 4년에 걸쳐 160명의 HPC 전문가를 양성할 계획이다.
◇중국·일본과의 경쟁 속 한국의 기회= 현재 아세안의 디지털 인프라 시장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지배적이다. 중국은 ‘디지털 실크로드’ 전략을 통해 아세안 각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으며 일본 역시 오랜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선점해왔다. 중국과 일본은 세계적인 슈퍼컴퓨터 선진국이기도 하다. 자체적으로 슈퍼컴을 개발하고 운영하고 있지만 선진 기술 유출이 우려되는 만큼 보유 기술을 동남아 국가에 이전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은 슈퍼컴 개발을 하지는 못하지만 안정적인 운영 경험이 있다. KISTI의 이번 프로젝트는 한국이 가진 독특한 강점을 살려 새로운 협력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세안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KISTI가 보유한 국가 슈퍼컴퓨터 운영 경험과 과학기술 연구망, AI 데이터 활용 노하우다.
한국의 AI 반도체 기업들이 이번 프로젝트를 발판으로 아세안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국내 기업들이 개발 중인 NPU 등 한국의 첨단 반도체가 아세안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게 KISTI의 판단이다.
KISTI는 개별 국가와의 협력도 추진 중이다. 인도네시아 연구혁신청(BRIN)과 MOU를 체결하고 구체적인 협력을 시작했다. 2024년 6월 체결된 이 MOU를 통해 양 기관은 HPC 인프라 구축부터 과학기술 협력, 빅데이터, AI 협력까지 포괄적인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와는 현재 KISTI가 운영 중인 슈퍼컴 5호기 누리온이 퇴역한 후 노드의 일부를 기부하는 협의도 이뤄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맞춤형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지원이나 인프라 구축을 넘어 한-아세안 간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협력 모델을 만들어가는 첫걸음이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한국이 보유한 과학기술 인프라와 노하우를 아세안과 공유함으로써 역내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고 공동의 번영을 도모할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전문가들은 현재가 아세안 디지털 시장 진출의 골든타임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세안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한국의 기술력과 운영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은 양측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식 KISTI 원장은 "아세안 HPC 센터는 아세안 국가들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라며 "본 사업을 통해 아세안 국가들이 글로벌 AI 시장을 선도하는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