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인공지능(AI) 메모리칩 사용 승인을 서두르겠다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발언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 제품에 대한 그의 발언 가운데 가장 능동적이고 구체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황 CEO는 지난 23일(현지시간) 홍콩과학기술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 참석 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전자의 AI 메모리칩 납품 승인을 최대한 빨리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현재 검증 중인 삼성전자의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8단과 12단 모두를 납품받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황 CEO의 발언은 그가 지난 3월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GTC 2024’에서 삼성전자의 HBM에 대해 "테스트 중이며 기대가 크다"고 언급하고 부스에 전시된 HBM3E 12단 제품에 직접 사인을 남긴 이후 약 8개월 만에 나온 것이다.
그의 발언이 주목받는 건 최근까지 삼성전자에 대한 평가와 상반되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HBM3E를 납품할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인 평가가 많았다. 약 1년이 넘은 것으로 알려진 퀄테스트는 언제 완료될지 알 수 없을 만큼 지지부진해졌고 제품 수율과 발열 문제를 두고 양측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후문도 나왔다. 최근 황 CEO는 올 3분기(8~10월) 실적 발표 후 콘퍼런스콜에서 메모리 공급업체로 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을 언급하면서도 삼성전자는 입에 담지 않는 냉정함도 보였다.
황 CEO가 이번 인터뷰에서 삼성전자를 콕 집어 언급한 건 삼성 내부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과 무관치 않다. 특히 고객사가 원한다면 HBM을 자사가 아닌 경쟁사인 TSMC와 협력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를 활용할 수 있다고 한 삼성전자의 결단이 엔비디아와 막혀 있던 협상의 물꼬를 텄을 것이란 관측이 업계에서 유력하게 나온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3㎚(1㎚=10억분의 1m) 공정부터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적용하려 했으나 수율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고객 유치 경쟁에서 밀렸다. 현재는 세계 1위 TSMC와 시장 점유율에서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올 2분기 기준 TSMC가 62.3%, 삼성전자가 11.5%다. 삼성전자가 TSMC 파운드리를 활용할 경우 수율 등에 대한 염려를 지우고 고객사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가 HBM3E를 엔비디아에 공급하게 되면 SK하이닉스와의 정면승부가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같은 고객사인 엔비디아를 통해 양 사는 같은 유형의 제품을 두고 성능과 기술력이 직접적으로 비교될 가능성이 있어서다. 올 4분기부터 블랙웰의 대규모 생산과 판매를 앞둔 엔비디아의 사정이 양 사의 경쟁을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가 독점해온 HBM 공급 체계를 다변화하고 경쟁을 유도해 가격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단 계산을 했을 것으로 업계는 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은 HBM3E로 본격화돼 6세대인 HBM4까지 이를 것으로도 전망된다. SK하이닉스는 HBM4 공급을 내년 상반기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삼성전자도 지난 7월 신설된 HBM 개발팀을 필두로 HBM4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황 CEO의 발언은 아무래도 HBM 공급사를 늘리는 것이 엔비디아에 유리하다는 판단하에서 나왔을 것으로 본다"며 "(삼성전자의 공급 후) HBM 경쟁은, 앞으로 제품이 16단 이상으로 갈 것으로 보면 D램을 고층으로 쌓는 각 사의 공정 기술이 어느 곳이 더 정교하고 좋은 수율을 낼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