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정모씨(29)는 출근복에 크록스를 신었다가 이른바 '젊은 꼰대' 직장 선배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 옷차림에 신경 쓰라는 지적이었다. 정씨의 직장은 콜센터였다. 상담 업무 특성상 외부인과 협업할 기회는 없었다. 복장 규정도 없었다. 정씨는 "슬리퍼를 끌고 온 것도 아닌데 난감했다. 복장 허용 범위를 미리 알려줬으면 신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많은 국내 기업이 출근할 때 편한 복장을 허용하지만 보수적인 문화가 남은 탓에 일부 아이템에는 견해 차이가 나타난다. 크록스가 대표적이다. 원래 서핑 등 여름철 물놀이를 위한 야외용 신발이다. 실용성과 편안함에 요즘 크록스를 찾는 이가 많다. 하지만 화장실 실내화 같은 투박한 디자인 탓인지 상황과 장소에 따라 박한 취급을 받기 일쑤다.
이런 추세는 온라인상에도 쉽게 발견된다. '크록스를 신고 출근하는 건 어떠냐'라는 제목의 인터넷 게시글에는 "개인적으로 꼰대 기질이 있다. 겉으로 말은 못 하지만, 속으론 크록스 신고 출근하는 건 이해 못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개념 없는 행동이다. 인터넷에서나 쿨한 척이다"고 옹호하거나 "복장 규정이 없으면 상관없지 않나"라고 반박하는 등 의견이 갈렸다.
격식에 맞는 옷차림이란 해묵은 논쟁엔 흔히 TPO 개념이 거론된다.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맞춰 옷을 입어야 한다는 의미다.
TPO는 일본 사고방식에서 나온 일본식 영어(재플리시)다. 1960년대 일본 남성복 브랜드 VAN 창립자인 켄스케 이시즈(1911~2005)가 정립한 개념으로 알려졌다. 서양 의복(아이비리그 룩)을 올바르게 입어야 한다는 정당성과 일본 남성의 인식 전환이 목적이었다. 반면 서양에선 TPO는 생소한 개념이다. 서양에서의 옷차림은 사전에 요구된 '드레스 코드'가 없는 이상 타인의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한국의 결혼식 문화는 서양 문화와 일본발 TPO가 기형적으로 섞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결혼식 하객복은 축의금 액수만큼 민감한 문제다. 여성 하객에겐 더욱 그렇다. 신부보다 튀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적용된다. TPO는 신부를 위한 불문율에 좋은 수단이다. 30대 직장인 여성 이모씨는 "예비 신부인 친구가 밝은 옷을 입어도 괜찮다고 말해도, 정작 주변 눈치에 고민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민폐 하객이란 딱지가 붙는 것이 싫어서다.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인 제니는 지난달 지인 결혼식에 참석해 새하얀 셔츠 외 온통 검은색인 옷을 입었다. 이 모습이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공개되자, 국내에선 '매너복' 등의 긍정적 반응이 주류였다. 반면 해외에선 '장례식장 같다' '직장인 출근복 같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국 사회는 서구권의 영향을 받아 개방적·자율적 사회로 변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불문율이란 존재는 역설적이다. 불문율로 서로를 옥죄고, 혹여나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스스로를 단속하는 광경이 벌어진다. 보이지 않는 불문율에 갇힌 한국인, 이유가 뭘까.
토착심리학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각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사회다. 그런데 한국인은 상대방에게 자기 영향력을 끼치려는 내면의 욕구가 다른 동아시아 국가보다 크다고 한다. 즉 개인별 기준은 존중하되, 자신만의 기준을 요구하는 행동이 큰 문제라고 보지 않는 독특한 이중성이 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불문율은 사회적 합의보단 '나만의 규칙'인 경우가 많다"며 "한국 사회가 개방적 사회로 진화했다 한들 공동의 기준을 벗어나길 꺼리는 집단주의 사회인 점도 분명하다. 집단주의 가치관이 개인주의 욕구와 충돌하면서 갈등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한 학자는 "다양성은 다양한 기준을 만든다. 전근대적인 사고가 지배했던 과거엔 유교적 질서란 하나의 규칙 아래 큰 갈등이 없었다"며 "오히려 사회가 개인의 다양성을 강조할수록 각자의 자율성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려다 보니 서로 충돌해 갈등을 유발한다"고 설명했다.
또 "이러한 맥락에서 타인의 자율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때론 지위나 직책, 또는 자기 기준의 당위성을 도구 삼아 상대방이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라는 식의 압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상대방이 별일 아닌 문제를 스스로 과장해 자율성을 포기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앞서 출근복 크록스와 결혼식 하객복 사례가 그렇다. '젊은 꼰대'도 마찬가지다.
아울러 "특히 전근대적 사고가 남아있던 1970~1980년대 결혼식은 예식의 기준이 주로 집안 어른들에 맞춰져 하객 옷색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며 "반면 오늘날엔 그 기준이 신랑과 신부에게로 넘어갔다. 자신이 제일 돋보여야 한다는 신부의 '절대 만족' 기준에 따라 하객의 옷색에 대한 집착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신부 측의 불문율에 하객은 되레 민폐를 끼칠까 봐 자율성을 포기하는 셈이다.
지금은 문화적 과도기란 진단도 나왔다. 문화의 빠른 변화 속도를 전통적인 공동체 규율이 쫓아가지 못해서 사회적 충돌이 일어난다는 분석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과거 집단 공동체 구성원들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법이나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며 "현대 사회에선 사람들의 생각이나 생활 방식이 너무나 빨리 변한다. 또 자유와 효율성을 강조하지만, 규칙은 그때마다 바뀌기 어렵다”고 했다. 또 "젊은 꼰대는 집단의 결속력이나 리더십을 높이기 위해 기성세대에 편승한 것"이라고 봤다.
임 교수는 "동아시아권의 문화가 조금 경직돼 있다. 장례식엔 모두 검은 옷, 결혼식엔 신부 보다 튀면 안 된다는 규칙이 강하다"며 "생각해보면 결혼식에 주례가 없어진 것도 엄청난 일이다. 양가 부모가 나와서 덕담하는 것도 예전엔 없던 일이다. 그만큼 결혼식 문화도 굉장히 바뀌었다"고 했다. "결혼식 하객복 같은 불문율도 굉장히 빨리 풀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젊은 사람들은 자율성을 매우 중요시해서 외국처럼 더 개방적인 문화를 빨리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며 "밖에서 레깅스를 입고 다녀도 이제는 아무도 지적을 안 하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