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지 하루 만인 지난 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부터 당선 축하 전화를 받았다. 전화 통화 현장에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부효율부(DOGE) 수장으로 지명된 '기업인' 일론 머스크가 배석했다. 러시아와 3년 가까이 전쟁 중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축하 메시지에 우크라이나에 스타링크 서비스를 지원해준 머스크에 대한 감사 인사도 함께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머스크는 우크라이나 전쟁 초반부터 사실상 '참전'했다. 스타링크 위성 통신 서비스로 우크라이나의 소규모 부대가 실시간 드론 정보를 공유하고 휴대전화 서비스가 중단된 지역에서 연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이후 머스크가 스페이스X의 비용이 들어가는 것에 불만을 표하며 크림반도 등 일부 지역에서 서비스를 끊었고, 결국 미 국방부가 비용 부담에 나서는 일이 벌어졌다.
세계 1위 부호인 기업인 머스크가 세계의 이목이 쏠린 전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9월 공개된 머스크 전기에는 그가 당시 페도로프 부총리와 주고받은 암호화된 문자 메시지까지 속속들이 공개됐다. 2년 9개월이 지난 현재 머스크는 트럼프 당선인의 옆에서 미국의 실권자로 또 한 번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하고 있다.
머스크는 '정치·외교 이슈에 공개 언급, 개입하지 않는다'는 여느 기업인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왔다.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현실 정치 의견을 게재했고, 필요할 땐 직접 개입했다. 2021년 9월에만 해도 "나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고 했으나, 이듬해인 2022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이 민주당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공화당에 투표할 것을 추천한다"고 말을 바꿨다.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엑스(옛 트위터) 인수 전후로 그가 변화를 보였다고 분석한다.
세계를 무대로 사업하는 그는 국제 정세에도 항상 큰 관심을 보였다. 중간선거가 있던 그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 이란 정부가 반정부 시위에 대응해 일부 지역에 인터넷을 통제하자 이란에 스타링크 위성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글을 올려 주목받았다. 테슬라 전기차 공장이 있는 중국과 관련한 질문을 받자 '대만을 홍콩처럼 특별행정구역으로 운영했으면 한다'고 말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사실상 정부 관료가 된 지금 머스크를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은 달라지고 있다. 지정학적 이슈와 관련해 거침없이 내놓는 그의 의견이 실질적으로 미국 외교 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 정상과 통화하는 트럼프 당선인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모습 그 자체로도 이러한 인식에 힘을 더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트럼프 당선 이후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머스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비밀리에 2022년 말부터 정기적으로 소통해왔다고 보도했다. 사업뿐 아니라 국제 정치문제까지 논의했으며, 푸틴 대통령이 '대만을 위해 스타링크 서비스를 제공하지 말라'는 부탁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이란 관리가 머스크와 회동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 미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고 했다.
러시아와 이란 정부는 이런 외신 보도가 나온지 하루 만에 모두 "가짜 뉴스"라고 반발했다. 미국 민주당은 스페이스X가 국방부, 미 정보기관과 수십억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한 점을 감안해 머스크가 연방 차원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며 대응했다.
머스크는 지난 3년간 수십차례 국가 정상을 비롯한 정치인과 만났다. CNN은 머스크가 2021년 8월부터 지난달까지 미국을 포함한 13개국의 정치인과 최소 32차례 만나거나 대화를 나눴다고 집계했다. 현직 국가 정상이 20명, 정치 후보자가 6명이었으며 그 외에도 정부 관료, 전직 국가 정상, 국회의원 등이 포함됐다. 비공개 만남이나 통화를 집계에서 제외한 것을 감안하면 실제 머스크가 세계 각국 정치인과 만난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머스크는 정치인들과 에너지, 전기차, 인프라, 경제, 무역, 사업 관련 주제로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전략국제연구소(CSIS)의 제임스 루이스 전략기술프로그램 담당 국장은 CNN에 "머스크가 글로벌 인플루언서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엑스를 사용하게끔 만들려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있어 보인다"면서 "대부분의 최고경영자(CEO)는 정치를 피하지만 머스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정치적인 톤이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머스크는 평소 국가 정상들과의 소통을 즐겼다. 테슬라, 스페이스X, 엑스 등 글로벌 기업의 수장인 본인의 지위와 권력을 활용해 소통의 자리를 자신의 이익으로 연결 짓는 데 적극 활용했다. 각국 정상들이 원하는 투자 결정이나 공개 지지 선언 등을 바탕으로 관세를 낮추거나 필요한 법안을 마련토록 하는 식이다.
특히 머스크는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 우파 성향의 국가 수장과 관계를 돈독히 맺고 정치력과 사업력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극우 성향 자유주의자'로 평가받는 밀레이 대통령과는 서로 SNS에서 호감을 드러내며 상대방을 공개적으로 치켜세워왔다. 두 사람은 전기차 배터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핵심 광물인 리튬 개발 등을 놓고 투자 논의를 하고 있다. 대선 이후인 최근에도 머스크는 밀레이 대통령의 관세 인하 결정을 칭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외에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을 비롯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조르지아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등도 머스크의 지지를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두고 '머스크의 외교(Musk's Diplomacy)'라고 표현하면서 "우파 성향의 세계 지도자를 유혹하면서 이익을 도모했다. 머스크가 지지를 보내면 다수의 우파 성향 국가 원수들에게는 국제적 명성이 추가돼 홍보 효과가 생겼다"고 전했다.
기업인인 머스크가 국가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같이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보유 기업의 자금력뿐만 아니라 기술력이나 영향력 등이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스타링크가 핵심 역할을 한 것처럼 테슬라, 스페이스X 등의 기술을 활용하거나 엑스로 여론의 향방에 개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리에트제 샤케 스탠퍼드대 사이버 정책센터 연구원은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에 "머스크가 보유한 기술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정보와 지정학에 대한 접근성 측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고 중요한 단계에 있다"고 평가했다.
수년간 국가 정상들과 관계를 구축해온 머스크의 행보를 마냥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실제 조 바이든 현 미 행정부도 머스크의 괴짜스러운 행동과 일방적인 의사 결정 때문에 종종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으나 그를 직접 제지하기가 어려워 골치 아파했다는 언론 보도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갑작스럽게 스타링크 사용료를 내라고 요구한다거나 트위터를 인수해 큰 혼란을 야기한 일 등이 대표적이다.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미국이 견제하는 중국,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정부 입장에서는 곤란한 부분 중 하나라고 분석하며 머스크가 보유한 기업의 기술력이 워낙 독보적이라 그의 외교에 족쇄를 채우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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