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참되지 않고 흩어져 있으며 사라져 버린다. 자연은 항상 동일하다. 하지만 자연의 가시적 현상을 보면 존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폴 세잔
빈 노트와 싱그러운 꽃이 든 화병이 높낮이가 각각 다른 좌대에 놓여 창밖의 햇살을 마주한다. 바로 뒤 벽면엔 이 풍경을 담은 사진이 걸려있어 또 다른 차원을 안내하듯 눈앞의 현실과 기록된 순간의 경계를 겹쳐낸다. 독일 현대미술가 유르겐 스탁(Juergen Staack·47)은 “사진에서 시작한 설치 작업이지만, 결과적으로 최대한 사진을 배제하고, 해가 있는 삶, 시간이 지나며 시들고 죽어가는 꽃, 그 찰나에 집중해 이를 100%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작업 의도”라고 설명했다.
언어와 이미지의 경계에서 원본에 천착해 이를 시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으로 주목받은 유르겐 스탁은 서울 강남구 서정아트 서울에서 한국의 홍순명 작가와 2인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통해 한국을 찾았다.
스탁은 이번 전시에서 “생태적 존재인 ‘시간’이 동정(動靜)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대한 고찰을 담아냈다”고 말한다. 내리쬐는 태양의 빛이 사물에 비춰 생긴 그림자에서 시간의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그는 인화지를 직접 태양 아래 노광시켜 그 순간을 붙잡아 둔다.
빛은 꽃병 앞 빈 노트 위에 그림자로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찰나의 시적 순간은 이를 바라본 관객의 기억 속에 영원으로 존재하게 된다. 스탁은 이 순간을 폴 세잔의 말을 빌려 “서두르지 않으면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그 순간을, 실존을 온전히 붙잡아 순간을 기록해둔다.
찰나의 순간은 아름답지만,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그는 경계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전시장 3층,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 작품 ‘모아레(Moir?)’는 천의 패턴이 겹쳐 만든 시각적 오류를 미적 도구로 만든 작품으로, 배경의 라이트 박스를 켜자 전혀 다른 패턴을 연출해 옵티컬 아트를 연상시켰다.
사진을 전공한 스탁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사진이 일반화된 지금, 대중은 말보다 이미지로 소통하면서 주관적 판단 없이 이미지 자체를 쉽게 진실로 믿는다”고 했다. 그는 “이를 경계하는 것이 나 자신의 고민 중 하나인데, 스스로 두 개의 현실이 있다고 믿는다. 실제 물리적 현실과 디지털 가상 세계. 이 물리적 현실에서 실존을 증명하기 위한 고민이 나를 사진에서 설치 작업으로 이끌었다”고 밝혔다.
주관적 판단 없이 이미지를 맹신하는 사이 SNS를 통해 ‘가짜뉴스’가 퍼지는 현상을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지켜보며 스탁은 “언론이 무력화되는 과정에서 심각해진 사회 현상을 통해 사진가로서 더 진실을 담아야겠다는 책무가 생겼다”고 말했다.
전시 주제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주목한 ‘시간’ 속에 인간은 존재하고, 시간을 통해 존재를 증명한다. 스탁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축적, 변화시키는 시간을 통해 존재의 중심 주제로 오랫동안 탐구해온 시간의 본질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일상의 사소한 순간순간을 민감하게 포착하시기를 바란다”며 “자연만큼 위대한 예술가는 없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12월 2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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