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배임죄는 고의성 여부가 중요한데, 법률의견서에서 ‘이런 행위가 법령 위반 소지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적시한 로펌의 문건 자체를 검찰이 고의성 입증의 단서로 쓰는 경우가 있다. 결국 기록을 안 남기려고 구두로 설명하는데 당연히 법률 자문의 질이 떨어진다.” (대형로펌 소속 A 변호사)
“법률 자문 서류는 압수수색 대상이 될 수 있어 받자마자 파쇄하다 보니 준법감시 자료가 법무팀에 안 남아 있다. 그런데 나중에 외국기업과 특허소송이 붙으면 준법 경영 절차가 미비하다며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판사 출신 B 변호사)
로펌·법무팀을 대상으로 한 검찰의 강제수사가 부쩍 늘어남에 따라 변호사 업계의 원성이 커지고 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로펌·의뢰인 간 법률 자문 및 의견서’까지 가져가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하는 일이 빈번해서다. 변호인의 방어권이 무력화될뿐더러 기업의 자체적인 준법 경영감시(컴플라이언스) 시스템도 유명무실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무법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수사와 법률 자문 서면 자료의 재판 증거 채택이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7월 서울경찰청 공공범죄수사대가 서초동 변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사례가 있었다. 앞서 지난해 8월에는 금융감독원 자본시장특별사법경찰이 법무법인 율촌을 압수수색해 카카오와 하이브의 SM엔터테인먼트 인수전 당시 카카오 측 법률 자문 내용을 확보했다. 이 자료는 지난 3월29일 서울남부지법의 ‘배재현 전 카카오 투자총괄대표의 시세조종 의혹 사건’의 공판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율촌(2016·2023년), 태평양(2022년), 김앤장(2018·2019년) 등 로펌에 대한 검찰 압수수색 사례는 해마다 논란을 불러왔다.
법조계에서는 해당 사건들의 유·무죄와 별개로 법률 자문 자료가 압수되고, 법정에서 증거로까지 인정된 데 대한 갑론을박이 첨예했다. 범행 동기 등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면 변호사와 관련된 내용이라 하더라도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돼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헌법이 규정한 변호인의 방어권과 조력권을 침범하는 행위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 대형로펌 특허소송 전문 변호사는 “법률자문서는 검찰 입장에서 피고인 및 피조사자의 수사, 조사, 기소, 공판에 활용하기에 유력한 자료”라면서 “수사기관은 상대방의 강점과 약점, 대응 전략까지 사실상 패를 모두 아는 상황에서 경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한 지식재산권 전문 변호사도 “감독 당국이 행정조사를 시작할 때 요구서류 목록에 ‘변호사 의견서 및 업무 요지가 기재된 변호사 보수 청구 명세서’를 가장 먼저 요청하는 게 관행이 됐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피감기관이 문제 발생 원인을 되짚어보려고 변호사에게 발송한 정돈되지 않은 자료를 손쉽게 근거로 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형사법·회사법 전문 변호사는 “의뢰인이 고해성사한 자료에 CCTV를 다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검찰이 로펌이나 변호사 사무실을 강제수사 할 경우 변호사가 작성한 문건이 광범위하게 압수수색 대상이 된다. 변호사와의 이메일, 문자, 카카오톡 등의 교신 내역을 포함해 검찰 조사 참여시 변호사가 남긴 메모, 사내 변호사와 로펌 간의 논의 내역 등이 그 예다. 변호사가 작성한 법률의견서에는 소송전략을 포함해 법률위반 여부에 대한 자문 내용이 폭넓게 담긴다. 이 때문에 검찰·경찰뿐만 아니라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등 행정기관도 조사 시 ‘법무팀과 로펌부터 먼저 조사’하는 일이 관행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전언이다.
기업들은 이 같은 관행이 법인의 내부 통제 제도인 컴플라이언스(기업 준법감시) 제도를 사문화한다고 지적한다. 컴플라이언스는 회사가 사업을 수행하면서 법률을 준수하고 임직원 등에 의한 법률 위반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체적으로 이를 방지하는 시스템이다. 기업활동이 고도화되고 규제나 관련 법도 세분됨에 따라 기존의 ‘사후 처벌 방식’이 아니라 회사의 자체적인 내부통제 시스템을 통해 준법 경영을 독려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무팀을 대상으로 한 강제수사가 반복되면 기업은 누설 가능성을 고려해 법령 위반을 확인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문의하게 되고, 컴플라이언스가 형해화된다”고 짚었다. 정 교수는 “변호사는 불완전한 정보에 근거해 피상적인 자문을 하게 되고, 기업 이사회도 위법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 현행 변호사법은 전·현직 변호사가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된다는 ‘변호사의 비밀유지 의무’를 규정(제26조)할 뿐 변호사가 의뢰인과 나눈 대화 내용 또는 자료의 공개를 거절할 수 있는 권리는 정하지 않고 있다. 형사소송법 제112조는 ‘변호사 등이 그 업무상 위탁을 받아 소지 또는 보관하는 물건으로 타인의 비밀에 관한 것은 압수를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여기서 ‘업무상 위탁을 받아 소지 또는 보관하는 물건’의 범위에 변호사가 자문 과정에서 생성한 문서가 포함되는지 안되는 지는 불명확하다. 이 때문에 ACP 도입을 골자로 하는 변호사법 개정을 통해 변호사의 압수거부권을 공고히하자는 것이 변호사 업계의 주장이다. 이태한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은 “변호사의 비밀유지권이 보장돼야 준법감시인이 기업의 각종 사업수행에 불법적인 요소를 파악해 사전에 이를 제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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