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등 민간 암호자산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결제 수단으로 주목받는 가운데 전 세계 중앙은행은 민간 암호자산에 대응하기 위해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관련 연구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CBDC가 도입될 경우 정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제공되는 바우처 프로그램이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높은 수수료를 부담해야 했던 국가 간 지급결제가 개선되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다만 개인정보보호나 통화정책의 효율성 저하 등의 우려가 많은 만큼 사회적 합의 도출이 선결 과제일 것으로 보인다.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법정 화폐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원화가 전자적 형태인 디지털원으로 바뀌는 것이다. 비트코인 등 암호자산이 민간에서 발행되는 것과 달리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기 때문에 법적 지위와 안정성이 보장된다. 기존 지폐와 동전이 전자적 형태로 변화한 것일 뿐 동일한 가치를 지니며 디지털 지갑 등을 통해 거래가 가능하다는 편리함이 있다.
CBDC는 활용 범위와 사용 주체에 따라 소매용(범용·retail) CBDC와 기관용(wholesale) CBDC로 나뉜다. 소매용 CBDC는 현금과 마찬가지로 직접 발행돼 가계, 기업 등 경제주체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다. 반면 기관용 CBDC는 지급준비금과 유사하다. 은행 등 금융기관에 발행돼 금융기관 간의 자금거래와 최종 결제 등에 활용된다. 우리나라가 현재 테스트하는 것은 기관용 CBDC다.
전 세계 중앙은행이 CBDC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 건 스마트폰과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의 등장이 계기가 됐다. 신기술의 등장으로 경제와 산업 전 부문에서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자 지급결제 환경도 변화하게 됐다. 2010년대 후반부터 가계의 현금 이용 비중은 지속해서 감소했지만 신용카드 이용 규모는 증가했다. 또 카카오, 네이버 등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들이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등으로 지급결제 시장의 점유율을 확대해 가면서 이용자 데이터를 독점하는 등 시장지배력을 키워갔다.
스테이블코인의 등장도 CBDC 논의를 촉발했다. 2009년 최초의 민간 암호자산인 비트코인이 등장했다. 다만 가격 변동성이 심한 탓에 화폐라기보다 고위험 자산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는데, 이에 따라 2014년 비트코인의 한계를 보완한 스테이블코인(달러화 등 기존 화폐에 고정 가치로 발행되는 암호자산) ‘테더(Tether)’가 등장했다. 이후 USD 코인(USDC) 등 다양한 스테이블코인이 새롭게 등장했다. 2019년에는 빅테크 기업인 페이스북까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리브라(Libra) 출시 계획을 발표하고 작년 8월 페이팔 또한 스테이블코인 페이팔 USD를 선보였다.
스테이블코인이 일상적인 지급수단으로 자리 잡는다면 예상되는 위험 요소가 많다. 자산의 가격 변동성이 커지면 대규모 인출사태(코인런)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또 은행의 자금중개기능 약화로 안전자산 수요가 증가하면 통화정책에도 제약이 발생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현행 법화를 일정 부분 대체할 경우 통화 주권을 위협하거나 불법적인 외화 유출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빅테크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면 기업의 시장지배력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조세 회피나 자금세탁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이에 각국 중앙은행들은 스테이블코인이 일상적인 지급수단으로 자리 잡기 전에 CBDC가 일종의 대항마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관련 연구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14일 한국은행 국정감사에서 이창용 총재는 “CBDC가 현실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의 대항마가 될 수 있나”라는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 질의에 “완벽한 대체재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대체재로 만들자는 것이 CBDC를 도입하고자 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답했다.
현재 미국, 일본, 중국 등 주요국은 CBDC 연구 및 개발의 강도를 점차 높여가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중앙은행의 94%가 CBDC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바하마, 나이지리아 등 일부 신흥국에서는 이미 소매용 CBDC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19년 도입을 검토한 뒤 조사와 평가 단계를 거쳐 현재 준비 및 구현 단계에 진입해 이르면 2025년 말 최종 도입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중국은 2014년부터 디지털화폐 및 전자결제 개발에 착수했고 최근까지도 CBDC 도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본 또한 2021년 CBDC 실증실험을 시작으로 기술 개발에 나섰다. 다만 미국은 다소 미온적인 입장이다. 2016년 연방준비제도(Fed) 연구를 시작으로 도입을 준비하고 있으나 개인 프라이버시, 보안 이슈로 인한 도입 반대로 완만한 속도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은행 또한 2020년 CBDC 연구 전담 조직을 신설한 이래 모의실험 연구(2021년 8월~2022년 6월), 금융기관의 연계실험(2022년 7월~2022년 12월)을 통해 범용 CBDC의 기술적인 구현 가능성을 검증했다. 이후 기관용 CBDC에 초점을 두고 CBDC 활용성 테스트(2023년 10월~2024년 말(잠정))와 아고라 프로젝트(2024년 4월~) 등 관련 연구를 추진 중이다.
CBDC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도입되는지에 따라 기능과 효용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은은 우리나라 경제에서 가장 적합한 CBDC의 설계와 운영 방식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단계를 밟고 있다. CBDC는 공공 화폐 인프라이기 때문에 기존 카드나 민간 지급 서비스 대비 보편성이 뛰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또 실시간 결제가 이뤄지기 때문에 오랜 정산 기간이 필요하지 않고, 분산원장 기술 등 프로그래밍 기능을 활용하면 정부나 지자체에서 제공되는 바우처 프로그램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절차와 규제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높은 수수료를 부담해야 했던 국가 간 지급결제 문제 또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도입에 앞서 기술적·경제적·법적 측면에서의 사회적 합의 도출이 선결 과제로 보인다. CBDC 도입을 두고 보안이나 개인정보 보호 측면에서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또 CBDC가 자본 이동을 촉진시켜 환율 변동성을 심화시키고 은행 예금 감소와 자본 유출입 증가로 금융 시장의 불안을 야기하는 등 금융시스템의 불안정을 초래할 가능성이 제기돼 왔다. CBDC가 법정 통화로 간주될 수 있는지, 단순히 디지털 결제 수단으로 간주하여야 하는지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고 거래와 관리 등에 대한 법적 책임과 권한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CBDC와 관련해 꾸준히 제기되어 온 소비자 프라이버시와 데이터 보호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한은 관계자는 “주로 범용 CBDC와 관련해 은행의 자금중개기능 약화, 개인정보 보호 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며 “CBDC 도입 여부에 대한 결정에 앞서 이 같은 우려에 대한 충분한 사전 검토를 진행해야 하고 실제 도입 이전에 다양한 안전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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