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떡.'
지난 13일부터 닷새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2024 유럽종양학회(ESMO)를 취재하며 현장에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글로벌 빅 파마는 자사의 최신 항암제가 암 환자를 오랫동안 안전히 살릴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앞다퉈 내놨다. 항체·약물접합체(ADC), 면역항암제 관련 연구 결과들이 쏟아져 나오며 "더는 암이 시한부가 아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양한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지만, 이를 넘어 죽을 수 있는 사람을 살려내는 산업은 제약·바이오가 유일하다는 점을 확인하는 기회기도 했다.
하지만 행사를 마치고 귀국하자 다시 암담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ESMO에서 무려 5~10년짜리 장기 투약을 통해 효능을 입증한 약이더라도 국내에서는 아직도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보기만 해야 하는 약'인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최근 "월 1000만원이 드는 면역항암제가 엄마를 살렸다"면서도 "더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환자 자녀의 호소가 국회 청원에 올라오기도 했다. 약효가 '너무' 좋다 보니 환자가 오래 살게 되고, 투약 기간이 늘어나면서 급여 적용이 어려워지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벌어진다.
제한된 건보 재정으로 수억원에 달하는 최신 항암제를 모든 환자에게 보장하기는 당연히 어렵다. 우리 정부는 빅 파마에 가격 인하를 요구하지만, "이미 한국에 글로벌 최저가를 제시했으니 더 낮출 수 없다"며 아예 약품을 철수하는 회사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니 이번 학회에서 공개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항암제 신약 연구개발 현실이 아쉬웠다. 재작년 HLB의 리보세라닙, 작년 유한양행의 렉라자 등 대형 발표가 있었던 것과 달리 올해는 아직 초기 단계의 연구 결과가 대부분이었다. 얼마 전 렉라자의 국산 항암제 최초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이제서야"라는 생각에 아쉬운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떠올랐다.
국산 신약 개발이 필수적인 이유는 의약품 시장 역시 경쟁 시장이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아무리 고가의 항암제더라도 만약 한국에 약효는 비슷하고, 가격은 훨씬 낮은 약이 있다면 소비자들은 그 약을 택할 테고, 빅 파마도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다. 렉라자가 이미 글로벌 기본 폐암 치료제로 자리 잡은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와 동시에 건강보험 급여를 적용받으면서 타그리소의 약가를 대폭 끌어내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제네릭이나 바이오시밀러도 이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만 몇십년이 지난 약가 인하는 그만큼 효과가 작을 수밖에 없다. 더 살고 싶은 환자에게 '그림의 약'이 아닌 '쓸 수 있는 약'을 안겨주기 위한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의 분발이 더 요구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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