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현수막에 넘어져 뇌진탕까지…당국-업체 책임 공방

30대 직장인 횡단보도 건너다 현수막 줄 걸려
당국 "업체에 보상받거나 국가 상대 손배소"
업체 "현수막에 걸려 넘어졌다는 증거 대라"

횡단보도를 건너던 시민이 불법 현수막에 걸려 넘어지면서 머리가 깨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당국과 불법 현수막 업체가 책임 공방을 벌이면서 시민은 배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21일 연합뉴스는 경기도 평택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A씨(35)의 사연을 보도했다. A씨는 지난 6월4일 오후 2시쯤 평택시의 한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뛰어가던 중 현수막의 길게 늘어진 줄에 목이 걸리는 바람에 뒤로 넘어졌다. 그는 머리를 바닥에 강하게 부딪혀 피가 났지만, 현장 근무를 위해 안전모를 쓰고 있어서 그나마 더 큰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사고 장소를 지나던 행인이 A씨를 부축해 길가로 데려갔으나 A씨는 앉은 채 30분 정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횡단보도 옆의 불법 현수막. A씨는 현수막이 걸린 화단을 가로질러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현수막 줄에 목이 걸려 뒤로 넘어지며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사진출처=A씨 제공, 연합뉴스]

횡단보도 옆의 불법 현수막. A씨는 현수막이 걸린 화단을 가로질러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현수막 줄에 목이 걸려 뒤로 넘어지며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사진출처=A씨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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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신경외과를 찾아 컴퓨터단층촬영(CT) 등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사고로 머리에 큰 충격이 가해져 피가 났고, 뇌진탕 증세가 나타난 것으로 확인됐다. 의사는 다행히 머리 외부로 출혈이 발생해 뇌출혈을 피할 수 있었지만,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진단했다. 또 정밀 검사를 위해 자기공명영상(MRI)을 촬영하자고 했다. 그러나 A씨는 비용 부담을 이유로, 추가 치료를 받지 않고 업무 현장에 복귀했다.

A씨는 사고 사흘 뒤인 지난 6월7일 국민신문고에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올렸다. 확인 결과 문제의 현수막은 평택시의 허가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설치된 것이었다. 관할 동사무소는 문제의 현수막을 즉시 철거하는 한편 관련 업체에 과태료를 부과하고 A씨에게 피해 보상 방안을 안내했다. 동사무소는 불법 현수막 게시 업체에 보상받거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A씨가 7월쯤 불법 현수막 업체에 연락했더니 업체 측은 A씨에게 현수막 줄에 걸렸다는 증거를 대라고 했다. 업체는 또 사고가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저의가 의심스럽다며 A씨 연락을 차단해 버렸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A씨가 알아봤더니 소송이 많아서 빨라야 1년 이상 걸릴 예정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또 소송을 위한 서류 준비와 변호사 선임 등도 A씨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A씨가 받은 국민신문고 민원 답변[이미지출처=A씨 제공, 연합뉴스]

A씨가 받은 국민신문고 민원 답변[이미지출처=A씨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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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현수막 업체 관계자는 연합뉴스에 "현수막을 허가도 받지 않고 걸어놓은 점은 죄송하다"면서도 "매일 돈 내놓으라는 전화가 많이 걸려 온다. A씨의 주장도 앞뒤가 잘 안 맞는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관계자는 "현수막은 횡단보도에 걸어놓지 않고 그 옆의 화단에 걸어놓았는데 본인 실수로 넘어진 것 아닌가"라며 "현수막에 걸려 넘어졌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A씨는 "현수막 줄에 목이 걸릴 때 목이 잘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생계를 위해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현장 업무를 하고 있지만, 머리가 계속 아프고 기억력도 떨어져 업무에도 차질이 생기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에 안전불감증이 너무 만연해 있으며, 불법을 저지른 업체와 이를 제대로 단속하지 않은 행정 당국 모두 후속 조치도 없고 무책임하다. 나 같은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현정 기자 khj2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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