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조합원 의사결정 왜곡하는 ‘서면투표’ 관행, 이참에 뿌리 뽑아야

서울 강북구 재개발구역의 한 조합원은 최근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조합 집행부 연임을 결정하기 위한 총회가 열리는데, 서면으로 미리 투표하는 게 어떠냐는 권유 전화였다. "총회에 직접 참석하겠다"고 했으나 회유는 계속됐다. ‘서면투표를 하고 참석하라. 바로 현장에 가면 총회 참석비도 적게 받는다’고 설득했다. ‘일단 만나자’고 하기에 서면투표를 강요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던 그는 결국 전화번호를 스팸 처리했다.


조합 집행부가 고용한 아웃소싱(OS) 요원들이 조합원들에게 서면투표를 강요하는 일은 총회를 앞둔 재개발·재건축 현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집행부도 ‘서면투표를 하고 총회에 참석하면 10만원, 현장투표만 하면 5만원’을 지급하는 식으로 미리 투표하기를 유도하고 있다. 원래는 총회 참석을 독려하기 위해 교통비로 지급하던 돈이었는데, 현장에 오지 않고 서면투표를 해야 더 받을 수 있게 지급 구조를 바꿔버린 것이다.

이처럼 서면투표만 여전히 강요하는 것은 온라인 투표가 가능해진 시대에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총회가 의사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온라인 투표가 더 간단한 해법이다. 일일이 조합원들을 만나는 수고로움을 일부러 택한 것인데, 조합원을 설득해 찬성표를 받기 위한 일종의 꼼수로 서면투표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된다. 찬성표를 미리 받으면 총회 개최 이전에 이미 결의가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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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서울 재개발·재건축 조합 해산총회에서 의결권의 85%는 서면투표였다. 실제로 한 총회에서는 현장투표로 80%가 반대했는데 서면투표에서 찬성이 90% 이상 나오며 결과가 뒤집힌 일도 있었다. 서면투표가 단순히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집행부 의도대로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8·8 공급대책에서 규제 샌드박스 차원에서 허용된 온라인 투표를 법제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에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온라인 투표가 가능한데도, 대부분 활용하지 않는 이유를 오히려 고민해야 한다. 올해 7월 기준 온라인 투표를 활용한 조합은 12개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라인 투표의 문호를 넓히기로 한 지금이 서면투표 관행을 없앨 기회다. ‘온라인 투표도 가능해진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참에 서면투표의 폐해를 제대로 점검하고 바꿔나가야 한다. 온라인 투표가 현실에 정착하는 과도기에서는 우선적으로 서면투표가 불가능한 안건을 확대해 장벽을 높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최종적으로는 문제 많은 서면투표를 없애는 방향이 돼야 할 것이다.





김혜민 기자 hm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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