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주거 공간에 맞는, 새로운 K-가구로, 가구 세계화에 도전하라."
국내 가구업계에서 김홍광 넥시스디자인그룹 부사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한샘의 김홍광'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가구 표준' 정립을 위해 가구업계의 의견을 모으고, 업계를 대표해 정부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 김홍광이었다. 그는 가구업계 '최고수(最高手)'다.
김 부사장은 "현재 '소품종 대량생산의 모듈화된 시스템 가구'로 토착화된 국내 가구산업은 시장변화의 대응력을 상실했다"면서 "뛰어난 건축기술과 우수한 가전 인테리어, 세계 제일의 사물인터넷(lot) 기술을 협업·융합한 K-문화가 반영된 새로운 가구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3년 스물두 살. 군대를 제대하고 진로를 고민할 때 여자친구가 내민 한샘 입사지원서는 가구업계 '고졸 신화'의 신호탄이었다. 그해 아홉 명의 동기와 한샘 수암공장으로 출근했다. 곱슬머리에 태도조차 불량한 그를 한샘은 반기지 않았다. 며칠 다니다 그만두겠거니 하고 방치하다시피 배치받은 곳이 출고제품 품질검사반이었다.
그렇게 '버려진 패' 취급을 받았던 고졸 신입사원 김홍광은 선배들의 방치가 오히려 기꺼웠다. 가구 부품을 분해도 해보고, 재조립도 해보면서 일에 재미를 붙였다. 선배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설계부터 생산, 관리, 판매 등 가구에 대한 모든 과정을 파고들다 보니 어느새 전문가가 돼 있었다. 입사 10년 만인 1993년, 품질검사반장의 타이틀에서 벗어나 사무직(주임)이 됐다. 2012년 직장생활 30년 만에 한샘의 이사대우로 승진, 고졸 신화를 썼다.
위기도 있었다. 2000년 한샘은 가구업계 최초로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한다. 김 부사장은 이 사업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으나 ERP 시스템을 도입한 지 한달여 만에 대량의 물류사와 발생한다. 그는 "시스템에서 오류가 발생, 대량의 물류 오더가 누락되면서 고객과 약속한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에 부닥쳤고, 회사는 수십억원의 피해를 내면서 거의 1년 만에 사고를 수습했다"면서 "당시를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단련되며 성장했다. 한샘에서 품질관리, 제품설계, 국내외 가구 제작 디테일 기술 개발, 제품 디자인 개발, 전시, 전산시스템 관리, 무역업무, 판매 후 서비스 관리, 환경·안전관리, 소재·공법 개발, 생활환경기술연구소장 등 모든 분야를 섭렵했다. 2016년 '대우'를 뗀 이사로, 2020년 상무로 승진했고, 2023년 7월 한샘을 완전히 떠났다. 2023년부터 중견기업인 넥시스디자인그룹에서 새로운 꿈을 펼치고 있다.
올해로 가구산업에 몸담은 지 42년째인 김 부사장이 'K-가구의 세계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현재 위기에 빠진 가구산업의 돌파구가 거기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K-가구의 기술과 저력도 믿지만, 국내에서 만든 가구가 세계 시장에서도 먹힌다는 점을 이미 경험했다.
한샘 품질검사반장 시절의 김홍광(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 당시 29세였다. 1990년 4월 한국의 가구회사에서 선발된 14명의 우수 직원들이 일본 연수를 다녀왔다. 연수 중 일본의 유명 가구회사 '토토'사를 방문해 견학한 뒤 함께 사진을 찍었다. 흰 작업복을 입은 두 사람은 일본 토토사 직원. 당시 함께 연수를 다녀온 이들 중 몇 명은 이후 독립해 지금까지 가구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사진=김홍광 소장]
원본보기 아이콘그는 2007년 미국에 주방가구를 수출하기 위해 '미국용 가구 표준'을 별도로 만들었다. 미국인의 기호에 맞춰야 수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미국 가구는 전통과 튼튼함을 추구한다. 임대주택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사는 사람이 바뀌어도 가구는 그대로 사용한다. 이 때문에 두꺼운 합판과 원목으로 튼튼한 가구를 만든다. 기본 가구가 사각형 틀에 합판이나 원목으로 측(옆)판과 천지(아래위)판을 강철제 이음새로 연결하고, 앞부분에 만든 프레임(액자) 형태의 틀에 문을 다는 형태다.
김 부사장은 이 방식을 따르지 않고 측판과 천지판 연결을 강철 이음새를 쓰지 않고 대신 홈을 파 끼워 넣는 방식으로 제작표준을 만들었다. 그는 "이 방식의 유용함을 깨달은 미국의 가구업계의 85%가 현재 이 방식으로 가구를 제작하고 있다"면서 "미국 시장에서도 국내 가구 제작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사례"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전통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효율성을 이기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평생 매달려왔던 것이 바로 '가구 표준'이다. 가구산업은 부품기업 따로, 제조기업 따로, 유통사, 수입사가 따로 있다. 게다가 소파·침대·식탁·주방가구·수납가구 등 저마다 제조 회사가 다르다. '집'에 집결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분야마다 정보 공유나 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건설사(시행사)도 물량이 큰 아파트 건설 때 원가 절감을 이유로 가구를 세트로 발주하지 않고 캐비닛, 상판 등을 따로따로 발주해 협업 대상이 아닌 경쟁자로 인식하게 해왔다.
이 때문에 정부를 상대로 산업 전체의 통일된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고,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내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부처마다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저마다의 규제로 통제받으면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축아파트의 경우 국토교통부는 건강친화형주택건설기준에 따라 500세대 이상은 유해물질 방출을 통제한다. 환경부는 100세대 이상 건설되는 신축아파트에 대해 건축자재사전적합성인증제에 따라 규제한다. 김 부사장은 "100세대 이하, 500세대 이하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유해물질이 나오는 아파트에 살아도 된다는 것이냐"라면서 "이런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규제를 현실에 맞게 표준화하기 위해 지난 40년 동안 노력해왔던 것"이라고 했다.
총휘발성유기화합물(TVOC)에 대한 안전기준도 부처마다 다르다. 환경부의 환경표시인증 기준은 0.4㎎/㎡.h인데, 산업부의 안전기준은 4㎎/㎡.h로 무려 10배나 차이가 난다. 그가 가구 표준을 정립하고자 고치려 했던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2010년 그의 주도로 '한국가구산업발전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업계의 논의를 거쳐 정부에 가구산업에 적합한 '국가 표준'을 제정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다.
김 부사장이 회장을 맡아 협의회를 이끌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가구의 '친환경 등급'이다. 친환경 등급은 포름알데히드 방출량에 따라 E2 등급부터 E1, E0, SE0 등급으로 구분된다. 국내 가구는 환경부 기준 E1 등급만 충족하면 되지만, 그가 재직할 당시 한샘은 이보다 한 단계 높은 'E0' 등급을 준수했다. 그러자 다른 업체들도 한샘처럼 E0 등급을 '표준'으로 삼으면서 국내 가구의 친환경 등급이 저절로 높아지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는 가구산업발전협의회장을 비롯해 무역위원회 자문위원, 한국주택가구조합 단체표준 심사위원, 한국국가기술표준원 제품안전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거나 여전히 맡고 있다. 그 공로로 국가산업포장(2015년)을 받았고, 고졸임에도 2018년 대한민국 신지식인에 선정되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가구산업은 부품기업 따로, 제조기업 따로, 유통사, 수입사가 따로 있다. 소파·침대·식탁·주방가구·수납가구 등 저마다 제조 회사도 다르다. 각 분야마다 정보 공유나 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아 정부를 상대로 산업 전체의 통일된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사진=한샘]
원본보기 아이콘'업계 1위 한샘의 김홍광'일 때는 1위 기업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한 만큼 가구산업의 키를 쥐고 가구 표준을 하나씩 정립해 나갈 수 있었지만, 중견기업인 넥시스디자인그룹 부사장인 김홍광으로서는 주도적으로 업계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한계가 있다.
그러나 가구산업 발전을 위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김 부사장은 "국내 가구산업은 현실에 맞지 않는 규제와 인증제도, 행정 부처 간 각기 다른 기준으로 산업을 통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국가표준 확립 등을 위한 정부와 산·학·연의 협력체계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 부사장은 국내 가구산업은 현재 경쟁력을 상실한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소재는 유럽, 제조설비는 독일과 중국, 디자인은 이탈리아, 제조와 가격 경쟁력은 중국과 베트남이 한국을 앞서고 있다고 본다. 그는 "세계 가구시장 규모는 1440조원 규모로 추정되는데, 그중 중국이 360조원(25%)을 점유하고 있다"면서 "국내 가구산업은 전체 산업의 고작 0.05%인 10조원 정도를 겨우 유지해가는 실정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발달된 전자통신기술을 가구에 접목해 새로운 K-가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의 퇴진 이후 한샘의 사세가 기울어진 것은 우연일까. 또 가구산업이 불황에 빠진 것은 단순히 전방산업인 건설경기가 불황에 빠졌기 때문일까. 전 직장인 한샘에 대해 그는 "현재는 다소 실적이 위축돼 있지만, 또 다른 성장을 위한 과도기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본다"면서 "다만, 시장의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고 어떤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하느냐는 전적으로 현 경영진의 몫"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제 와서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들이 선두기업에 속해있는 입장에서 가능한 일들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면서 "이후 누가 이런 역할들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고 토로했다. 비판을 감수하면서 가구 표준 정립을 위해 나서야 했던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부재 이후의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담은 말이다.
30년째 주방가구 전문기업을 운영하는 J 대표는 김 부사장에 대해 "그는 작고 왜소한 체격이지만,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촌철살인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드문 인재"라면서 "40년 넘도록 가구만 파고들었던 만큼 세계 가구시장의 흐름을 꿰뚫는 그의 목소리에 업계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부사장은 후배들과 직장인들에게 슬기로운 직장생활에 대해 조언을 해달라고 하자 "직장인이라면 부하 직원이나 동료, 상관뿐 아니라, 관련 산업에서도 인정받고 존경받는 대상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서 "성실과 열정이 중요하다. 성실은 자기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고, 열정은 성공의 기본 역량이다. 열정에서 자기만의 가치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고수의 한마디
현재 가구업계는 단순한 위기 단계를 넘어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정부와 관련 산업 전체가 힘을 모아 대안을 모색하고 가구산업 자체적으로는 구조적으로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결국 새로운 가구 시스템을 개발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건축기술과 우수한 가전 인테리어, 세계 제일의 전자정보통신 기술을 가진 국가답게 사물인터넷(lot) 기술을 협업·융합해 새로운 주거공간에 맞는 새로운 가구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K-문화가 반영된 K-가구로 세계화를 시도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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