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의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에 대해 미국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체코 반독점사무소에 항의한 것과 관련, 국내 원전 전문가들은 '웨스팅하우스의 여론전'으로 평가하면서 협상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한수원을 재촉할 경우 오히려 협상에서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몸값을 높이려는 웨스팅하우스의 의도"라며 "시간을 갖고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정범진 경희 원자력공학과 교수도 "정부나 한수원이 협상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웨스팅하우스이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체코 총리 등 현지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문제없다"며 한수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체코 정부는 지난 7월17일 두코바니 신규 원전 2기 건설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한수원을 선정했다. 한수원과 체코는 내년 3월까지 최종 본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지난달 초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등으로 구성된 민관 대표단은 미국을 방문해 미 에너지부(DOE) 및 웨스팅하우스 고위 관계자와 만나 원전 수출 절차를 논의했다. 하지만 대표단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왔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48개국이 가입한 핵 공급 그룹(NSG) 지침에 따르면 원전 기술을 제3국에 이전할 때는 그 기술을 가진 해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한국은 1980년대 미국으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원전을 건설했다. 미국 원전에 기반을 둔 한국형 원전은 미국 에너지부의 수출 통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만 체코와 같이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은 나라로 수출할 때는 신고만 하면 된다. 문제는 신고 주체인 웨스팅하우스가 비협조적이라는 데 있다. 미국 정부 역시 민간 기업의 분쟁에 적극적인 개입을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민관대표단이 소득없이 돌아온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6일 웨스팅하우스는 체코 당국에 우선협상대상자로 한수원을 선정한 데 대해 진정(appeal)하고 또 이 사실을 보도자료로 배포해 외부에 공개했다. 이 사실은 한국과 체코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웨스팅하우스가 바라는 바 대로다.
원전 업계에서는 웨스팅하우스의 노림수를 크게 3가지로 보고 있다.
우선 원전 수주 시장의 경쟁자인 한수원에 대해 '독자적으로 원전 수출 능력이 없다'는 이미지를 국제적으로 심어주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전 세계는 '원전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신규 원전 프로젝트가 잇따를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과 계속 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 한수원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어 향후 수주전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겠다는 의도다.
또 웨스팅하우스의 대주주인 사모펀드 브룩필드가 회사의 몸값을 높이려는 의도도 다분해 보인다. 2006년 일본 도시바에 인수된 웨스팅하우스는 2011년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원전 시장이 침체되자 경영난에 빠졌다. 2016년 회계연도(2016년 4월~2017년 3월)에 7조원이 넘는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웨스팅하우스를 2018년 캐나다 사모펀드인 브룩필드가 46억달러에 인수했다. 사모펀드의 성격상 웨스팅하우스를 되팔기 전 최대한 몸값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다.
웨스팅하우스가 체코 원전 수주 사업의 일부를 맡기 원해서 계속 딴지를 걸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을 수주했을 당시 한국전력은 웨스팅하우스에 기술자문료를 지급하고 발전기 터빈 등 주요 설비 부문을 맡기는 방식으로 합의한 바 있다.
이유야 어쨌든 과연 웨스팅하우스의 주장이 납득할 만한지가 중요한데 원전 업계에서는 고개를 젓고 있다. 또 웨스팅하우스의 요구를 수용하며 합의했던 2009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 원전 업계의 설명이다.
웨스팅하우스는 26일 보도자료에서 "원전 입찰에 참여하는 사업자는 원전 기술을 체코 쪽에 이전하고 2차 라이선스를 제공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며 "한수원의 APR1000과 APR1400 원자로 설계는 웨스팅하우스가 특허권을 보유한 2세대 시스템80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수원은 원천 기술(underlying technology)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웨스팅하우스의 허락 없이 그 기술을 제삼자가 사용하게 할 권리(right to sublicense)를 보유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웨스팅하우스에 불리한 내용은 쏙 빠져 있다. 우리나라는 처음 원전을 짓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현재는 대부분을 국산화했다.
한국전력은 1987년 한빛3·4호기 원전을 건설하면서 미국 원전기업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과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한전은 1997년에는 이름을 바꾼 ABB-CE와 다시 기술사용협정을 체결했다. 이때 ABB-CE가 보유하고 있던 원전 기술이 웨스팅하우스가 언급한 시스템80이다.
특히 한수원은 2007년 ABB-CE를 인수한 웨스팅하우스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면서 한국형 원전을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 판매할 수 있는 권리도 함께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범진 교수는 "한국 기업이 나이키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신발을 만든 후 제3국에 판매할 수 있는 권리와 비슷하다"며 "웨스팅하우스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은 쏙 빼놓고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웨스팅하우스가 구체적인 기술을 특정하지 않고 '원천 기술'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우리나라가 핵심 원전 기술을 대부분 국산화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수원은 국내 원전 기업들과 원전 설계 핵심 코드, 냉각재 펌프, 원전계측제어시스템(MMIS) 등 3대 핵심 기술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설계 코드는 원자로 중심부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프로그램이며 냉각재 펌프는 원자로를 식히는 냉각재를 공급하는 장치다. MMIS는 원전 전체를 총괄한다.
한국이 체코에 공급하게 될 APR1000 원자로는 이 같은 국산 기술이 적용됐다. 또 2009년 UAE 바라카 원전 때와 달리 웨스팅하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우리 독자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해외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웨스팅하우스는 특정 기술의 침해를 주장하지 못하고 원전 구성 자체에 대한 원천 특허를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 원전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스마트폰의 둥근 모서리의 사각형 디자인에 대해 삼성전자를 대상으로 특허 소송을 제기한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종류의 특허 소송은 다툼의 여지가 크기 때문에 오랜 시간 소송에도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애플과 삼성의 디자인 특허 분쟁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7년을 끌었다.
전문가들이 한수원에 대해 빨리 매듭을 지으라고 재촉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서로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결론을 빨리 내고 싶어하는 쪽이 양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과 애플의 소송은 법정 밖 합의로 마무리됐다.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소송 및 중재를 각각 진행하고 있다. 2022년 10월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폴란드와 체코 등에 수출하려는 한국형 원전이 자사 기술을 활용했다고 주장하며 미국 정부 허가 없이는 수출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소송을 냈다. 지난해 미 법원은 1심에서 웨스팅하우스는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웨스팅하우스는 즉각 항소했다.
한수원도 2022년 10월 대한상사중재원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APR1400의 해외 수출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취재의 국제 중재를 신청했다.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계약에는 분쟁이 발생할 때 소송전이 아니라 KCAB 중재로 해결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웨스팅하우스의 진정은 체코와의 최종 협상에는 큰 변수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수주전 과정에서 웨스팅하우스가 동일한 주장을 제기해 체코 정부도 이미 인식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체코 정부는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전에 한수원 측에도 이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고 충분한 검토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체코뉴스통신사 CTK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페트르 피알라(Petr Fiala) 총리는 "내각은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의 분쟁을 인지하고 있고 조치를 취하고 있다"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통상부 측은 이번 수주전에는 법률, 경제, 에너지 등 각 분야 전문가 200명이 참여해 깊이 있는 검토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한편 웨스팅하우스뿐 아니라 막판까지 한수원과 경쟁을 펼쳤던 프랑스의 EDF도 진정을 제기했다. EDF는 구체적인 진정의 배경을 공개하지는 않았으며 공정성 및 투명성에 대한 내용으로만 알려졌다.
이에 대해 체코 정부 대변인은 "입찰에서 떨어진 사업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이라며 "이것이 입찰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체코전력공사(CEZ)의 라디슬라브 크리츠 대변인은 "보안 예외 규정에 따라 입찰에서 떨어진 사업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체코 내부에서는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의 협력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체코 원자력안전청(SUJB)의 다나 드라보바 청장은 지난 7월 한 라디오방송( iROZHLAS)에 출연해 "모든 가압경수로, 심지어 프랑스의 원자로조차도 웨스팅하우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며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가 UAE 바라카 원전에서처럼 체코에서도 협력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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