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운이 좋네요. 물건도 가볍고 작업 공간도 넓어요."
19일 오전, 15년 차 가전제품 설치 기사 장성옥씨(46)가 가정용 정수기와 돌돌 말린 튜빙선 뭉치를 이동식 카트에 옮겨 담으며 말했다. 포장 박스가 겉보기에 크진 않았지만, 직접 들어보니 성인 여성 혼자 들기엔 버거울 정도였다. 장씨는 15㎏ 가정용 정수기와 5㎏ 튜빙선 뭉치를 가리키며 "근 일주일 새 가장 가벼운 제품"이라고 웃었다.
살인적인 무더위로 가전제품 주문 건수가 폭증하면서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설치 기사들이 열악한 근무 환경에 내몰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설치 기사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지 2년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근무 환경이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며 '2인 1조 근무' 등이 정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가전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코웨이 등 가전 판매량은 에어컨·얼음 정수기 등을 중심으로 급증했다. 삼성전자의 7월 가정용 시스템 에어컨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약 25% 늘었고 같은 기간 일반 무풍 에어컨은 10% 이상 늘었다. 코웨이 얼음 정수기의 지난 4~6월 판매량도 전년 동기 대비 30% 뛰며 '폭염 특수'를 누렸다.
가전제품 설치 기사들은 빠듯한 스케줄과 폭염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기록적인 열대야가 이어지며 얼음 정수기 등 가전제품 주문량이 폭증하고 있어서다. 오전 6시30분께 출근해 오후 6시까지 끼니도 거르고 일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탓에 무더위 속 30㎏에 달하는 물건을 들고 뛰어야 할 때도 많다.
실제 이날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 가정집을 방문한 장씨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동식 수레에 제품과 공구 등 20㎏가량을 싣고 엘리베이터로 내달렸다. 하루에 10건에 달하는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다. 이날 오전 서울의 최고 기온은 35도로 전국 대부분 지역에는 폭염 특보가 내려졌다. 이동 거리는 5분 남짓이었으나 금세 장씨의 이마엔 긴 땀이 흘러내렸다.
장씨가 소속된 회사는 내부 지침을 통해 40㎏ 이상 가전제품의 경우 설치 기사가 2인 1조로 작업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2020년 설치 기사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안전사고 예방 목적으로 개정된 결과다. 그러나 현장 근무자들은 이런 내부 지침이 현실적으로 지켜지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설치 장소가 1층이거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경우엔 지침에 적용되지 않는 데다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는 설치 기사와 시간을 맞추기도 어려워서다.
장씨는 "요즘엔 하루 평균 10건 정도 소화하고 있는데, 업소용 제품은 크고 무거워 40㎏ 넘어갈 때도 있다. 나 같은 성인 남성도 혼자 나르다 보면 현기증이 생긴다"며 "2인 1조 근무를 명시한 회사 내부 지침이 있다지만 사실상 정착됐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무더위 속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일은 안전사고 위험이 높다며 40㎏ 이상 넘어가는 제품을 옮길 시 설치 기사들의 2인 1조 작업 등이 보장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되던 설치 기사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지 2년여가 지났으나 여전히 근무환경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요즘 같은 날씨에 40㎏ 이상 되는 제품을 혼자 들다 보면 온열 질환에 걸릴 위험이 크다. 사측에서 충분한 휴식 시간과 2인 1조 작업 등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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