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20년간 서울~대전 운전에도 무사고"…고령운전자 따가운 시선에 씁쓸

고령운전자 교통사고 비율 20%대
"기본권 침해 피하는 방향으로 가야"

"면허 반납? 90살엔 해야지. 아직 건강하니까 더 몰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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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에서 만난 곽모씨(80)는 목에 힘을 줘 말했다. 방금 고령운전자 대상 '인지 능력 검사'를 마치고 나온 그는 "검사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며 "나이를 먹었다 보니, 터치 패드가 잘 안 눌렸을 뿐이지 문제는 거의 다 맞은 것 같다"고 자신감도 내비쳤다. 올해로 운전경력 40년을 맞은 그는 약 20년간 서울과 대전을 오간 '베테랑 운전자'다.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일주일에 1~2일 350㎞가 넘는 거리를 운전했지만, 무사고에 큰일 한 번 난 적 없었다고 했다.


곽씨는 "운전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피해를 주니까 나이를 먹으면 알아서 면허를 반납하는 게 도리겠지만, 나는 아직 건강하다고 생각해 조금 더 운전대를 잡으려 한다"며 "젊은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반납하라는 말엔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면허 갱신과 반납 사이 선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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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 10시 노인 30여명이 모인 서울 서부운전면허시험장 '고령운전자 교육장'엔 적막감이 맴돌았다. 운전면허 갱신을 위한 1차 관문인 치매 검사를 통과한 후 2차 관문인 인지 능력 검사를 받기 위해 이곳에 모인 이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태블릿 PC 앞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었다.


테스트를 앞둔 긴장감도 엿보였다. 전문 강사가 1시간가량 진행될 인지 능력 검사의 내용과 방법 등을 설명하자 한 노인은 미리 준비해둔 종이에 설명을 받아 적으며 복습하려는 듯 내용을 중얼거렸다. 또 다른 노인은 강사의 설명에 맞춰 "그치"라고 반복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날 진행된 고령운전자 인지 능력 검사는 교통표지판 변별검사, 방향 표지판 기억검사 등 총 5가지로 구성됐다. 검사 결과에 따라 운전 적격·부적격이 판정되는 것은 아니나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운동 습관과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전문 강사가 알려주기 위해서다. 본격적으로 시험이 시작하자 곳곳에선 "뭐가 있었지?", "이거 왜 이래?"하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특히 빠르게 지나가는 숫자를 기억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선택하는 문제에선 당황스러운 듯 헤드셋을 벗고 두리번거리는 노인들도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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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발생한 '시청역 역주행 사고'를 계기로 고령운전자 면허 반납에 대한 사회적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고령운전자가 증가함에 따라 매년 고령운전자 사고 비율 역시 높아지고 있는 탓이다. 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에 따르면 2019년 14.5%였던 65세 이상 운전자 사고 비율은 지난해 20.0%까지 상승했다. 5건 가운데 1건이 고령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였다.


그러나 시험장을 찾은 대부분 노인은 최근 불거진 고령운전자 운전에 대한 논란을 알고 인지하고 있다면서도 "면허는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나이가 많아 매번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멀리까지 나서기도 힘들뿐더러 생계를 위해 반드시 운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김봉근씨(75)는 "더이상 운전을 하기 힘들면 자진해서 면허를 반납하는 것이 본인과 남을 위해 좋다"면서 "그러나 65세 이상이라고 해서, 마치 모두 운전할 능력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속상하다. 운전이 꼭 필요한 만큼 5년 정도는 더 운전대를 잡고 싶은 마음"이라고 전했다.


"고령운전자 면허, 사회적 공감대가 우선"

이에 무조건적인 면허 반납을 요구하기보다 정부가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각 지자체는 면허 자진 반납자를 대상으로 10만원에 달하는 인센티브 카드를 지급하고 있으나 금액이 미미하고 일회성인 탓에 효과는 떨어진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서울시 65세 이상 운전자의 면허 반납률은 5년째 5~6%대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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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65세 이상 고령운전자를 대상으로 '조건부 면허'를 도입하되 택시 기사 등 생계형 부류는 구분해 별도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조건부 면허제란 고령운전자를 대상으로 심야 운전, 고속도로 운전 등을 제한하고 일부 상황에만 면허를 허가하는 제도다. 정부가 조건부 면허제 도입 계획을 밝히자 택시기사·화물차 운전자 등 생계를 위해 운전이 꼭 필요한 계층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일었다.


최재원 한국도로교통공단 교수는 "조건부 면허를 도입하되 고령운전자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이 필요하다"며 "예를 들어 농촌에 거주해 차 없이 이동이 힘든 어르신들께 수요응답형 교통(DRT)을 제공하고 택시 기사 등 생계형 부류엔 전방에 사물과 사람이 있을 때 긴급 제동하도록 하는 '긴급 자동 제어 장치' 등을 장착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실질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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