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대출을 유도하는 모든 과정은 금융소비자가 너무나도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최첨단화되는 반면, 상담 서비스 등에선 금융소비자와 노동자(콜센터 인간 상담원) 모두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있어요. 금융회사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변화’라며 양해를 구하지만, 그 과실은 금융소비자와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겁니다.”
김관욱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문화인류학 전공)는 최근 서울 강북구 덕성여대 연구실에서 아시아경제와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미완성의 인공지능(AI) 기술이 성급하게 콜센터 상담 현장에 도입되면서 인간 상담사도 업무 부담을 느끼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먼저 불편함·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건 금융소비자”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의료인류학자인 김 교수는 2012년부터 10여년 간 금융회사 등이 운영하는 콜센터 문제에 집중해 온 연구자다. 2022년엔 근 10년간 콜센터를 찾아다니며 현장의 인간 상담원과 인터뷰하고 연구해 온 바를 담은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10여년간 콜센터 문제에 천착해 온 김 교수에게도 AI 상담 서비스 확산에 따른 콜센터 노동 현장의 변화는 놀라웠다. 단행본을 낸 지 불과 1~2년 새 AI 상담으로 불편함과 어려움을 겪는 금융소비자(고객)·인간 상담원(노동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 교수는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후속 연구를 진행하다 듣게 된 흥미로운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일선 콜센터 현장에서 인간 상담원들이 ‘사람입니다, 고객님’이란 표현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단 얘기다.
그는 “인간 상담원 연결에 앞서 AI 상담 서비스를 거쳐야 하는 경우도 많다 보니, 기다림에 지친 금융소비자들이 통화에 앞서 ‘AI인가요, 사람인가요’를 묻는다고 한다”면서 “인간 상담원으로선 책 제목처럼 ‘사람입니다, 고객님’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불과 1~2년 새 이런 흐름이 정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물론 챗봇 등을 통해 상담원 연결이 불가능한 야간 시간대에 문제를 해결하거나, 단순문의 사항을 빠르게 안내받을 수 있다는 점에선 AI가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당장 내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선 오히려 대기시간이 더 길어진 셈이다. 더 빠른 연결, 더 빠른 문제 해결, 즉 고객 편의를 위해 AI를 도입했지만, 실질적으로 금융소비자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짚었다.
금융소비자의 편의를 위해 도입된 AI 상담 서비스가 되레 고객 불편을 야기하고 있는 원인으로 김 교수는 미완의 AI 기술을 꼽았다. 콜센터 상담의 요체는 고객의 불편·불만을 이해하고 이를 요약·정리하는 ‘듣기’ 능력인데, 아직 AI 상담 서비스는 인간 상담원의 ‘듣기’를 대체할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콜센터 상담의 핵심인 듣기를 위해선 단순히 상담 내용을 인지하는 것뿐 아니라 (내담자의) 연령·목소리·억양·감정과 같은 비언어적 정보에 대한 해석 능력이 필요하고, 또 이를 빠르게 요약·정리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능력도 갖춰야 하지만 AI 상담 서비스의 수준은 이에 미달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금융소비자와 인간 상담원 모두가 불편한 이 상황은 ‘고객상담은 전문지식이 필요하지 않고, 비숙련 노동인 만큼 AI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는 금융회사의 선입견이 만들어 낸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며 “아직도 많은 이들이 AI를 로봇처럼 단순 업무를 반복하는 자동응답시스템(ARS)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측면, 또 (AI를 실제 기능보다) 과장해 광고하는 측면도 있다”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대안으로 AI 기술을 비서 역할, 즉 업무보조 수단으로 우선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금융회사가 금융소비자와 노동자 모두의 만족을 위해 AI를 활용한다고 한다면 현재로선 인간 상담원이 파악한 결과를 토대로 정확한 정보를 빠르게 제공하는 비서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담당토록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며 “다만 아직 많은 금융회사는 '내부자가 아니라 용역회사 직원인' 인간 상담원의 AI 비서 기능 접근을 제한하고 있어 아쉽다”고 짚었다.
실제 일부 시중은행이 AI 상담 서비스의 한계를 인지하고 궤도수정에 나선 사례도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한 시중은행의 경우 AI 상담 서비스를 운용해보고 난 뒤, 인간 상담원 대체율 목표를 60%에서 20%로 크게 낮췄다고 한다”면서 “아울러 인간 상담원들도 AI를 비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상담원들의) 호응을 끌어내고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AI 상담 서비스가 의도와 다르게 고객에게 일부 불편함을 준 것처럼, 일선 현장에서 근무하는 콜센터 인간 상담원들에게도 의외의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지연된 민원 처리에 분노한 금융소비자를 상대하면서 업무가 어려워지고 있는 측면도 있지만, AI가 단순 업무를 대체하면서 오히려 개개인의 업무량은 늘어나고 있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이런 흐름은 콜센터 인간 상담원들의 노동 형태도 바꿔놓고 있다. AI로 단순 상담업무가 줄어들면서 인간 상담사들에게 새로운 업무가 부과되고, 기존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 ‘윤리노동(ethical labor)’ 또는 ‘도덕노동(moral labor)’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회수(채권 추심)'다.
김 교수는 “기존의 콜센터 노동이 (블랙컨슈머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감정노동의 영역이었다면, 최근 콜센터 노동은 상담사들이 (금융회사의) 이윤 확대를 위해 회수업무에도 집중적으로 투입되면서 (연체) 고객에게 모욕을 가하거나 때로는 공감대를 형성해 상환을 끌어내는 윤리·도덕 노동의 영역으로 바뀌고 있다”면서 “다시 말해 기존엔 ‘친절함’이라는 감정을 팔았다면, 최근엔 책임감과 양심을 팔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상담 서비스를 받는 금융소비자에게도 영향을 준다. 김 교수는 “상담원들은 이미 자신의 업무가 감정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금융소비자가 불친절하다고 느끼더라도, 빠르게 전화를 끊고 더 많은 콜을 받는 것이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는 지름길”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별개로 고용의 질도 악화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콜센터 인력이 축소되고 있는 것은 물론, 업무강도 상승에 따라 떠난 인간 상담원의 빈 자리도 불안정한 노동 형태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근 10여년간 콜센터 산업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면서 콜센터를 경험한 경력단절 여성들이 상당히 많고, 이에 따라 기업들도 별다른 시간·비용을 투입하지 않고도 경험을 지닌 인간 상담원을 모을 수 있다”면서 “AI 상담으로 인해 업무강도가 더 높아져 인간 상담원이 그만둔다고 해도, 그 자리는 단기계약직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짚었다.
김 교수는 전술한 상담 노동의 특성상 AI 상담 서비스가 인간 상담원을 전면 대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금융소비자와 인간 상담원 모두가 불편한 콜센터 산업의 문제를 계기로 AI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AI가 가장 빠르게 침투하고 있는 산업인 콜센터 산업을 기점으로 향후 이런 갈등이 곳곳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AI에 대해 ‘황금빛 미래’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 교수는 “콜센터 산업은 AI와 노동이 가장 빠르게 부딪히고 있는 영역이나, 아직은 당사자나 언론계를 제외하면 관심이 크지 않다”면서 “전 세계가 전력 질주를 하는 산업인 만큼 AI가 피할 수 없는 미래인 측면은 있지만, 이것이 가져올 미래가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미국·유럽처럼 AI와 노동에 대한 사회적 공론장을 마련해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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