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산간 도로에서 무면허 운전을 하다 연달아 교통사고를 낸 후 도주한 40대가 뒤늦게 음주 사실을 시인했지만 음주 운전 혐의는 적용받지 않을 전망이다. 현행법상 음주운전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음주 수치가 검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일 제주동부경찰서에 따르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과 도로교통법(사고 후 미조치) 위반,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40대 운전자 A씨가 "사고가 발생하기 5∼6시간 전인 점심때 소주 4∼5잔을 마셨지만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진술했다고 이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앞서 A씨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5·16 도로에서 사고를 낸 뒤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경찰과 소방 당국이 출동하기 전 차량을 버리고 인근 수풀 속으로 달아났다. 이 때문에 사고 당시 그의 음주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후 사건 발생 약 13시간 40분 만에 경찰이 A씨를 긴급체포해 음주 측정을 진행했지만, 그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였다. 경찰은 곧장 채혈을 진행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검사를 의뢰했으나 여기서도 음주 수치는 검출되지 않았다.
당초 A씨는 1차 조사에서 "술을 마시고 운전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지만, 조사가 진행되자 이를 번복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행법상 피의자가 음주를 시인했어도, 음주 수치가 검출되지 않으면 음주운전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음주 수치와 함께 진행한 약물 검사에서도 음성이 나왔다"고 밝혔다.
현행법상 음주운전 혐의를 적용하려면 운전 당시 혈중알코올농도가 0.03% 이상이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음주 정황을 토대로 시간 경과에 따른 혈중알코올농도를 역추산하는 위드마크 기법도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역추산할 최초 수치가 필요하다. 음주 수치가 검출되지 않은 이번 경우에는 적용이 어려운 이유다.
A씨는 지난 10일 오후 6시 39분께 한라산 성판악 탐방안내소 인근 5·16 도로에서 서귀포 방면으로 쏘나타 차량을 몰다 중앙선을 침범해 승용차 3대를 잇달아 들이받은 뒤, 파손된 차를 몰고 도주를 시도하다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 오던 간선버스와 다시 충돌했다. 이 사고로 버스 승객 등 3명이 다쳐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한때 극심한 차량 정체가 빚어졌다.
사고 당시 차량을 두고 도주한 A씨는 다음날 오전 8시 20분께 사고 현장에서 약 13㎞ 떨어진 제주시 양지공원 인근 도로에서 목격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 그는 "사고에 대한 기억이 없고, 아침에 눈 떠보니 풀숲에 누워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음주 사고를 내고 현장을 이탈한 가수 김호중씨 사건 이후 교통사고를 낸 뒤 현장을 벗어나 추가 음주를 하거나 음주 측정 없이 도망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경찰의 정확한 음주 상태 파악을 방해하기 위해 추가 음주를 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이른바 ‘김호중 방지법’(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국회에 2건 발의됐다. 하지만 음주 측정치가 있어야만 처벌이 가능한 도로교통법 조항에 대한 개정 움직임은 아직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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