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신고를 하려면 내용을 엑셀로 정리하라는데, 노인이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한국사기예방국민회 관계자)
"피해자가 영상신문실에 출석했지만, 고령과 청력 문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제주지법 코인 사기 무죄 판결문 중)
고령층의 노후·생계 자금을 노린 '가상자산(코인) 연계 사기'가 늘어나고 있지만 복잡한 범행 구조와 부족한 정보 등 가상자산 사기 범행의 특성이 고령 피해자에게 더욱 가혹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경제가 한 달간 ▲자체 설문조사 ▲금융감독원 신고접수 현황 ▲고령층 대상 코인 사기 범행 판결문 ▲피해자 측 인터뷰 등 자료를 심층 취재한 결과 고령 피해자는 범죄자 처벌과 피해 회복을 위한 단계마다 난관에 부딪히는 등 처참한 현실을 겪고 있었다.
17일 아시아경제가 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받은 금감원 '가상자산 불공정거래 및 투자사기 신고센터'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신고 접수 건수는 총 1102건이었고, 50대 이상 고령층의 신고가 396건(35%)을 차지했다. 지난해 6~12월 총 1504명 중 466명(30%)이 50대 이상으로 조사된 것보다 고령층 비중이 더 늘어난 것이다.
특히 60대 신고자의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올해 대부분의 연령대에서 신고 건수가 감소했지만 60대는 지난해 6~12월 119건, 올해 1~5월 139건을 기록했다. 집계가 완료되지 않은 지난달 통계를 제외하고도 20건이 늘면서 유일하게 증가세를 보였다. 금감원은 "가상자산 연관 투자 사기가 기승을 부린다"며 지난해 6월부터 '가상자산 연계 투자사기 신고센터'를 출범시켰고, 올해 1월부터 '가상자산 불공정 거래 및 투자 사기 신고센터'로 확대·개편해 운영 중이다.
고령층의 피해 사례가 늘고 있지만 고령 피해자로선 경찰 등 정식 수사기관에 신고하는 단계부터 난관이다. 피해 내용을 접수할 때 문서 프로그램인 '엑셀'로 정리할 것을 요구받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기예방국민회 관계자는 "신고·고소 접수를 하려면 거래소 전자지갑 주소의 입출금 내역, 거래 아이디, 거래당 금액 등을 계산해 엑셀로 일일이 작업해야 한다"며 "변호사도 누구도 잘해주지 않는 작업인데, 엑셀을 못 하는 노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형사 재판이 열린다고 해도 고령 피해자라는 특성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2019년 서울 강서구에서 3400만원 규모의 '코인 사기'를 벌인 혐의로 기소된 A 피고인의 재판은 서울이 아닌 제주도에서 진행됐는데, 고령의 피해자는 제주지법의 거듭된 증인신문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피해자는 서울남부지법에 설치된 영상신문실에 나가 제주지법 법정과 화상으로 연결해 증인신문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5월 A 피고인에겐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영상신문실에 출석했지만 고령과 청력 문제로 영상신문의 방법으론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이후 증인신문 절차엔 소환이 되지 않거나 연락이 닿더라도 계속 출석하지 않았다"며 '증거 부족'을 이유로 들었다.
이처럼 디지털 접근성이 다른 연령층보다 낮지만 고령층은 가상자산 투자 권유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아시아경제는 지난 5월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의 도움을 받아 수도권 거주 고령층(50대 이상) 157명을 대상으로 가상자산 투자사기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 문항 적정성은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의 조언을 받았다. 개인의 사기 피해 경험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려는 고령자의 특성상 표본 확보가 쉽지 않았지만 고령층의 가상자산 투자재원이 노후자금으로 사용된다는 점, 가상자산에 대한 이해가 적은 데도 투자 권유를 받은 사례들이 확인되는 점 등 유의미한 현황을 살필 수 있었다.
설문 결과 응답자의 대다수인 145명이 '투자 경험이 없다'고 답했고, 그중 24명(16.6%)은 '가상자산 투자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가상자산 투자 경험이 없는 응답자들에게 '투자를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과반인 73명(50.3%)은 '가상자산의 개념이나 투자 방법을 모른다'고 답했고, 64명(44.1%)은 '가상자산 투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향후 투자 의향을 묻자 121명(83.4%)이 '없다'고, 5명(3.4%)은 '있다'고 답했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9명(13.1%)이었다.
가상자산 투자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전체에서 12명(17.6%)이었다. 이들 중 7명(58.3%)은 '자녀 외 지인의 추천'을 투자 계기로 꼽았다. 가상자산 투자 재원을 근로소득 6명(50%), 연금 3명(25%) 등 '노후자금'으로 꼽은 응답자의 비중은 75%였다. 투자 규모는 '100만원 이상 500만원 미만'이 5명(41.7%)으로 가장 많았다.
김주연 한국사기예방국민회 대표는 "우리나라가 인터넷 강국이라고 하지만, 이를 배경으로 사기 수법까지 고도화된 것이 또 하나의 현실이다. 그래서 사기꾼의 목표는 대부분 노인"이라며 "어르신들 대부분은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는데, 수명은 연장되고 복지는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노후 대처가 안 돼 있어서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자식들한테 손 벌리기도 막막하니까 고수익을 보장하는 사기꾼의 말에 더 넘어가기 쉽다"고 말했다.
가상자산 사기에 대한 고령층의 취약성은 법원에서도 확인됐다. 범행 모의 단계부터 고령층을 겨냥한 사례들도 여럿이었다. 고령층 사기 피해자는 노후자금으로 써야 할 돈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범행으로 인한 후유증이 다른 연령대보다 심각했다.
지난 3월 서울동부지법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B 피고인은 '코인 설명회'를 열어 2000만원가량의 투자금을 편취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검찰은 "피고인 일당이 코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노인, 주부 등을 상대로 이른 시일에 특정 코인의 가격이 크게 오를 것처럼 속여 투자금을 편취하기로 모의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은 C 피고인은 자신이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보호하던 고령 피해자에게 사기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증권사에 다니는 남편을 통해 주식투자를 의뢰해 매월 수익금을 주겠다"고 했지만 피해자가 믿고 맡긴 노후자금 3400만원은 가상자산 투자에 활용됐다. C 피고인의 남편은 사실 가상자산 투자회사의 직원이었고, 피해자의 투자 덕에 회사에서 인센티브를 얻었다. 전주지법 군산지원 재판부는 "피해자는 주식이 아닌 변동성 높은 가상자산에 투자할 경우 원금손실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고지받지 못했고, 피고인은 매월 수익금을 안정적으로 주거나 원금을 정상적으로 상환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며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강원도 철원의 민간인 통제구역에 조성할 테마파크와 연계될 코인"이라며 380억원대 규모의 가상자산 투자사기를 벌여 1심에서 징역 12년과 벌금 25억원을 선고받은 D 피고인 사건에서도, 대부분의 피해자는 고령층이었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재판부는 특정경제범죄법상 횡령, 사기, 방문판매법 위반, 유사수신행위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그에게 "피해자 중 상당수가 노인으로서 피해가 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피해자들과 합의하지 않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질책했다.
장진용(가명) 피고인은 2021~2022년 "해외에 예치된 외화 수백억원을 회수하려면 수수료 등 비용이 필요하다"며 김미옥씨(가명) 등 대부분이 고령인 피해자 11명으로부터 총 10억여원을 편취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돈을 돌려달라'는 김씨 측의 요구를 받자, "3년 전 코인회사에 투자해 수익금을 코인으로 받아 맡겨뒀다. 현금화를 위한 수수료를 모아달라"며 추가로 돈을 뜯어낸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4월 서울중앙지법 1심 재판부는 장진용 피고인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범행으로 인한 피해자들은 대부분 고령이거나 경제적으로 소득이 높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경제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자들이 진술한 피해 내용을 다음과 같이 판결문에 기술했다.
'가상자산 투자사기'에 대해 심층 취재 보도할 예정입니다. 코인 범죄 근절을 위한 종합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제보(lsa@asiae.co.kr)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특별취재팀> ▲팀장 이선애 부장 △김민영 차민영 김대현 황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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