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개혁방향을 두고 ‘완전적립식’으로 바꾸자는 주장과 소득대체율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맞붙었다. 신승룡 한국개발연구원(KDI) 재정·사회정책 연구위원은 미래세대에 부담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본 반면, 정세은 충남대 교수는 보장성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토론에 참여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국고투입을 두고 “동의한다”는 측과 “호도하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대립했다.
이 같은 주장은 2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바람직한 국민연금 개혁방향’을 주제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나왔다. 토론회는 KDI와 한국경제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했다.
신 연구위원은 이날 첫 발표자로 나서 “세계 최저 출산율 국가 한국에서는 국민연금 모수개혁만으로는 기금이 소진돼 세대 간 형평성이 크게 저해된다”며 “출산율에 영향을 받지 않는 완전적립식 신연금을 구연금과 분리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신 연구위원은 지난 2월21일 완전적립식으로의 개혁을 촉구하는 ‘국민연금 구조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완전적립식이란 내가 냈던 보험료를 내가 연금으로 돌려받는 형태다. 현재 국민연금은 미래세대의 보험료로 연금을 받는 부과식이 일부 반영된 ‘부분적립식’이다. 근로자가 보험료를 내면 일부는 기금에 적립하고 일부는 노인의 연금급여로 지출한다. 저출산·고령화 기조에 따라 근로자 1명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미래세대 부담을 덜어주려면 완전적립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신 연구위원의 주장이다.
신승룡 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 부연구위원이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KDI와 한국경제학회 주최로 열린 '국민연금 개혁 방향 토론회'에 참석해 ‘완전적립식 국민연금 구조개혁 방안’이란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원본보기 아이콘신 연구위원은 완전적립식이 연금 부담이 가장 적은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부과방식을 통해 세대 간 연대에 기초하고 있는 현재 국민연금은 장기적인 기대수익비가 1 미만임이 수식으로 증명된다”면서 “장기적으로 기금운용수익률이 경상성장률보다 높으면 완전적립식 연금을 통해 기금·운용수익을 최대화해 국민부담을 최소화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완전적립식으로 개혁을 시작하면 국민연금은 신연금과 구연금으로 나뉘게 된다. 개혁 시작부터 납입하는 보험료는 모두 신연금으로 쌓고 완전적립식을 적용한다. 구연금의 경우 개혁 이전의 기대수익비를 급여 산식에 따라 지급한다.
다만 완전적립식 연금으로 나아가려면 재정운용방식을 추가로 논의해야 한다. 신 연구위원은 “구연금의 재정부담은 2040년대부터 국내총생산(GDP) 대비 3~4% 수준으로 발생하고 2090년대에 GDP 대비 0.1% 이내로 소멸한다”면서 “적립금이 소진되기 전부터 기금운용수익률과 국채이자율 간의 차익을 이용하면 더 효율적으로 재정을 투입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신 연구위원은 “어떤 방향의 보험료율 인상도 완전적립식이 아니라면 폰지의 연장선이라는 인식이 있다”면서 “이미 1000조원 이상의 기금이 있음에도 추가 재정투입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완전적립식 기금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낙관론적 연금개혁에 대한 책임을 미래세대에 전가하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정세은 충남대학교 교수가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KDI와 한국경제학회 주최로 열린 '국민연금 개혁 방향 토론회'에 참석해 ‘제5차 국민연금 재정추계와 합리적 연금개혁 방안’이란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원본보기 아이콘보장성 강화를 우선으로 둬야 한다는 정반대 목소리도 나왔다. 정 교수는 “국민연금의 현재 보장성 수준으로는 기초연금과 결합해도 최소한의 안정적인 노후소득 보장을 제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보장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공적연금의 보장성 강화는 100% 세금으로 조달되는 기초연금보다는 국민연금을 강화하는 것이 재정안정과 국민 설득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국민연금 제도가 저축 수단이 아니라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한 복지제도임을 인식하고 재정안정을 보험료로만 감당하는 제도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며 “장기적으로 내는 것보다 많이 받는 고급여 구조는 연금개혁을 통해 이미 거의 해소됐다”고 주장했다.
또 현재 국민연금 제도개혁을 논의할 때 국고 투입 여부와 방식도 포함해 다루자고 제안했다. 정 교수는 “초기 가입자에 대한 관대한 보장, 저임금 노동자·영세 자영업자 보험료 지원, 군 복무 및 출산에 대한 보험료 지원 등을 위해 국고 투입을 포함할 필요가 있다”면서 “국민연금 재정 안정성을 보험료 조정만으로 달성하는 것은 보장성 강화라는 중요한 목표를 간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민연금 부담의 공정한 분배는 세대 간 형평성 문제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신 연구위원과 정 교수는 연금제도의 문제점을 바라보는 시각도 상이했다. 신 연구위원은 보험료율을 18%로 올려도 소득대체율 40%를 적용하면 2080년에 기금이 소진되고, 보험료율은 34.9%까지 오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반면 정 교수는 국민연금 보장강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노인빈곤 문제가 미래에도 개선되지 않고, 노인부양비(생산가능인구 100명이 부양해야 하는 노인인구)가 2080년 110.3명으로 치솟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조동철(오른쪽) KDI 원장과 김홍기 한국경제학회 회장이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KDI와 한국경제학회 주최로 열린 '국민연금 개혁 방향 토론회'에 참석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원본보기 아이콘토론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완전적립식 신연금’ 에 힘을 실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서구에서 공적연금이 성숙하던 20세기 중후반엔 뒷세대가 앞세대 노인을 일정 부분 부양하도록 하면서 (뒷세대에) 의존하는 게 적절했다”며 “21세기엔 경제와 인구구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뒷세대 부담을 사전에 줄여주는 게 현재 요구되는 세대 간 계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내가 받을 기금을 내가 적립하되 기금운용수익률의 효과를 기대하는 방식이 불가피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두 발표 모두 (실현)할 수 없는 희망고문”이라면서도 “신 연구위원의 안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다수가 낸 만큼 받는 방식으로 연금제도를 전환했고, 이는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적인 저출산 현상이 계속되면서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은 사상 처음으로 0.6명대로 떨어진 바 있다.
다만 기금운용수익률과 국채이자율 사이 차익을 이용하자는 신 연구위원의 주장은 우려스럽다는 평가다. 원종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상근전문위원은 “채권을 발행해 기금운용수익률을 높이겠다는 표현은 걱정된다”며 “빚내서 그 레버리지로 투자하라는 것인데 저로서는 겁나는 표현”이라고 전했다.
재정 투입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원 전문위원은 “두 발표자 모두 국고 지원을 언급한 데 크게 동의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연금은 1988년 시행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운용자금의 90% 이상을 채권에 투자하도록 통제받아 왔다”며 “당시에도 지금처럼 기금을 운용할 수 있었다면 기금운용의 연평균 누적 수익률은 5.8%보다 높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익률이 5%대에 그친 건) 정부 책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고 지원에 동의하는 이유다”고 전했다.
‘국고 만능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 윤 연구위원은 “국고 투입으로 호도하면 안 된다. 보험료 적게 내자고 재정을 투입하는 나라는 없다”며 “정부가 과거 (실수한) 부분을 충당하는 정도만 투입하는 게 적절하다”고 언급했다. 청중으로 참여한 박광용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필요하다면 재정을 투입해야겠지만 우리나라가 재정여력 있는지도 분명히 판단해야 한다”며 “고령화 문제로 의무지출도 늘어난다. 장기적으로 GDP 대비 복지지출 비중이 18%까지 오르는 만큼 재정여력이 크지 않다”고 밝혔다. 또한 “재정 투입이 ‘꼼수’가 될 수 있다”며 “보험료 올리는 대신 재정을 투입하는 건 미래 세대에 조세라는 짐을 지우는 것이고, 이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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