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업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듯 사모펀드(PEF) 운용사도 같은 운명이다. 운용사의 핵심은 인재 관리다. 이것을 잘하면 블랙스톤처럼 되는 것인데, 지금 어피니티는 갈림길에 있는 것 같다."
국내 대기업 및 소액주주들과 연이어 갈등을 빚으면서 재계와 자본시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홍콩계 사모펀드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어피너티)에 대한 업계 관계자의 냉혹한 평가다. 그간 교보생명, 신세계, 현대카드, 카카오 등 주요 기업들의 재무적투자자(FI)로 참여해 기업의 우군이자 PEF 업계의 불패신화로 불려 온 어피너티가 시장 상황 악화로 투자회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피너티 내부적으로 한국계 파트너들이 줄줄이 사임을 하고 중국계 파트너들의 입김이 강해지는 한편, 투자 기업들과의 갈등이 외부로 표출되면서 대기업의 '전략적 동맹군'에서 '저승사자'로 평판이 바닥을 치고 있다.
어피너티는 삼성전자 출신의 박영택 전 회장이 말레이계 중국인인 탕콕유 창립회장과 손잡고 2004년 UBS캐피털 아시아투자조직을 중심으로 분사시켜 만든 PEF 운용사다. 2005년부터 오비맥주·하이마트·더페이스샵·로엔엔터테인먼트 등의 경영권에 투자한 뒤 최대 6배 이상으로 팔면서 PEF 업계의 역사를 썼다. 10명의 파트너 중 5명이 한국인일 정도로 국내 색채가 짙었다. 하지만 이철주 전 한국 대표가 2021년 회사를 떠나 영국계 PEF인 CVC캐피털에 자리를 잡고, 창업주인 박영택 회장도 지난해 3월 은퇴했다. 10년간 전문경영인으로 버거킹을 맡아온 문영주 전 비케이알코리아 대표도 경쟁사인 PEF칼라일그룹이 보유한 투썸플레이스 대표로 이직했다. 어피너티의 중추였던 굵직한 인사들이 물러나면서 중국계 파트너들의 주도권이 강해지는 분위기로 전해진다.
최근 이마트와 신세계는 SSG닷컴 FI인 어피너티·BRV캐피털과 풋옵션 요건을 놓고 협상을 진행하고 있지만,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양측의 풋옵션 효력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이 갈등 요인이다. 신세계 측은 SSG닷컴의 2022년 총 거래액이 5조7000억원을 넘기며 요건을 충족해 FI가 풋옵션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어피너티는 SSG닷컴 총거래액에 상품권 거래액이 포함돼 과다 계상됐다는 입장이다. 풋옵션 행사 예정 기간은 5월1일부터 2027년 4월까지다. 이에 대해 어피니티 측은 아직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신세계 측과 성실하게 논의하며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어피너티·BRV는 2018년 신세계그룹과 투자약정을 맺고 2019년 7000억원, 2022년 3000억원 등 총 1조원을 투자했다. SSG닷컴 지분을 15%씩 확보했다. 양측은 SSG닷컴이 2023년까지 총거래액(GMV) 5조1600억원을 넘기지 못하거나 복수의 투자은행(IB)으로부터 기업공개(IPO)를 할 준비가 됐다는 의견을 받지 못하면 FI가 보유주식 전량을 신세계 측에 매수해 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의 풋옵션 계약을 맺었다. 어피너티 측은 실적 부진과 시장 상황 악화로 SSG닷컴의 IPO가 미뤄지자 투자금을 조기 회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만약 어피너티가 풋옵션을 행사하면 신세계그룹은 약 1조원을 지급해야 한다. 주주 간 계약서에는 매매대금을 지급받지 못하면 대주주 및 인수인이 소유한 주식 전부를 매도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도 명시돼 법정 공방이 불가피하다.
어피너티의 풋옵션 분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어피너티는 풋옵션 행사 가격을 두고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과 지난 6년간 분쟁을 벌여왔다. 2012년 교보생명의 2대 주주였던 대우인터내셔널은 사업 자금 확보를 위해 보유 중이던 교보생명 지분 24%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어피너티는 이때 신 회장 측과 3년 안에 증시 상장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할 것을 약속받고 주당 24만 90000원에 교보생명 지분을 인수했다. 예정대로 IPO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신 회장을 상대로 풋옵션을 행사해 지분을 되팔 수 있도록 합의했다. 약속 기한이 지날 때까지 상장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양측은 갈등이 본격화했다. 어피너티는 2018년 안진회계법인을 통해 주당 41만원에 풋옵션을 행사하겠다고 통보했지만, 신 회장 측은 터무니없는 가격이라며 거부했다. 양측은 이후 지금까지도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최근 어피너티는 버거킹, 락앤락 등 다수의 투자 포트폴리오 기업 운영에서도 잡음을 내고 있다. 버거킹 운영사 비케이알은 최근 돌연 주력 제품인 와퍼 판매를 중단했다.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버거킹의 상징적인 메뉴다. 비케이알은 뉴와퍼 출시를 위한 마케팅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를 두고 관련 업계에선 버거킹의 고육지책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2016년 어피너티는 국내 PEF인 VIG파트너스가 보유하던 버거킹의 한국 일본 경영권을 약 2200억원에 인수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인 2021년 말 어피너티는 버거킹을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 하지만 매각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면서 관련 작업이 중단된 상태다. 지난해 버거킹 매출은 전년 대비 약 2% 감소했지만, 영업이익은 3배나 증가했다. 원가를 절감해 매출의 공백을 메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1위 밀폐용기 전문업체 락앤락의 경우엔 자진 상장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락앤락의 최대주주(69.94%)인 어피너티는 공개매수를 통해 잔여 지분을 확보한 뒤 상장폐지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현행법상 최대 주주의 지분율이 95.0% 이상이면 자진 상장폐지를 결정할 수 있다. 소액주주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공개매수 가격이 지나치게 낮다는 이유에서다. 어피너티가 제시한 공개매수 가격은 주당 8750원으로 공개매수 발표 전날 종가 8180원 대비 6.9% 높은 수준이다. 어피너티 인수 직후 2만8000원대까지 치솟았던 주가가 줄곧 내리막을 걸으면서 상장폐지가 되면 손실이 확정되는 주주들이 적지 않다는 이유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공개매수 저지를 위한 소액주주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어피너티가 실적과는 별개로 배당과 유상감자로 회수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비난이 커지는 이유다.
어피너티는 교보생명과 현대카드 등 소수지분 투자 과정에서 회수에 어려움을 겪은 데 이어 락앤락, 버거킹, 유베이스 등 경영권 투자에서도 실패가 쌓이며 이전의 명성을 잃어버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잡코리아, 요기요, SSG닷컴 등에 투자했지만 전망이 밝지 않다. 기존 경영진들이 투자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후 세대교체 및 투자전략 변경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나오는 것으로 해석된다.
A사모펀드 대표는 "어피너티도 한국에서의 평판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며 "호전적 액션을 취하고 싶지 않지만 문제 해결 방법이 소송밖에 없었던 측면도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피너티가 과거의 명성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걸을 것인지, 재도약의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지난해 한국 총괄대표에 오른 민병철 대표의 역할에 달렸다. 신임 민 대표는 최근 교보생명 이사회 구성원으로 합류했다. 어피너티의 새 대표는 과거 경영진과 달리 교보생명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과거 경영진이 장기간 분쟁을 감수하고 충분한 이익을 얻기를 원하는 강경파였다면, 민 대표는 실리파에 해당한다는 평가다. 신세계와의 협상 과정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B사모펀드 고위관계자는 "이슈가 생겼을 때 PE들이 좀 더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대기업들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무리해서 경쟁적으로 하는 관행이 전반적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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